자연은 계속 변해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풍경」과 「달밤」

by 데미안에너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 마흔다섯 번째 시!

45풍경.jpg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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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윤동주 시인은 언덕을 좋아했던 것 같다. 시에 ‘언덕’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다.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나지막한 언덕을 좋아했던 시인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긴 하지만 멀어지지 않고 주변에서 서성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 시 ‘풍경’처럼!

정현종 시인이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고 했다. 사람이 풍경이 된다는 건 내면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자기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그 힘이 자기 주위에 풍경으로 피어난다. 이것을 에너지,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보통 아우라 같은 말로 쓰기는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말한 풍경은 내면에서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면 피어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사람마다 내면의 색깔이 존재하고 각자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색깔들이 모였을 때 엄청난 빛을 발산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윤동주 시인도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 왼 하루 거닐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바다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라고 했다. 바다의 파도를 표현한 것일 테지만 나는 단어 그대로 언덕을 상상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라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시인의 이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는 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풍경처럼 피어나는 일보다 두각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고 그걸 성공했다 말한다. 그것 또한 각자의 색깔일 테니 어떤 색을 칠하든 자기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풍경을 선택하겠다. 풍경은 뒤로 물러나야 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진다.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는 일이 나에게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이 언덕을 자주 찾은 것은 잠시 객관적 시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조금, 아주아주 조금 세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풍경이 되어 관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발걸음을,

오늘은 조용히 따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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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 마흔여섯 번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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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과 2026년의 달밤


‘달’은 예술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존재인 모양이다. 과학적 설명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예술적 열정과 날것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무언가가 ‘달’에 들어있다. 그런데 달과 관련된 예술 작품에는 모두 한이 서려 있거나 애달픈 기운이 있는 것 같다.

태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 달을 보고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때의 달은 지금의 달과 같지만 달랐을 텐데!! 시인이 바라본 1937년의 달은 ‘죽음’과 연결돼 있다. ‘북망산’-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시대! 시인이 바라본 달빛은 아련하고 슬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묘지’엔 ‘흰 물결’이라도 비춰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달빛을 볼 수 있는 하늘인가, 현대 사회는? 21세기의 달빛은 ‘흰 물결’로 무엇을 ‘폭 적셔주고’ 있는가. 내가 있는 곳에서 보이는 달은 밝은데 실제 달에는 우주 쓰레기만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1937년과 2026년의 달에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고독과 정적이 달의 ‘흰 물결에 폭 젖었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지 50년을 넘게 살다 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우주에 떠 있는 달의 실체가 어떻든 달이 밤과 만나면 예술적 감성을 깨우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럴 것이다. 조만간 보름달의 ‘흰 물결에 폭 젖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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