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리뷰 | 이상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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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보》는 가부키를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부키가 생경하지 않고 관객에게 친절한 설명이 필요 없다. 감독은 인물들의 삶을 설득하지 않고 가부키 무대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부키 공연은 삽입곡이 아니라 자막이자 해설이며 복선이다.
가부키 공연 순서와 내용을 알면 더 잘 보이는 지점들이 있지만 굳이 몰라도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킨다. 다만, 알고 보면 분명해지는 게 있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 공연의 장면처럼 진행된다. 시간적 예술을 공간적 예술로 치환하는 장치로 긴 시간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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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関の扉(세키노토-국경의 관문) : 야쿠자의 세계에서 가부키의 세계로
어린 키쿠오는 첫 번째 공연에서 매춘부 스미조메(실제 정체는 고마치자쿠라의 정령)를 연기한다. ‘300년 된 벚나무의 정령’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키쿠오의 생애가 암시된다.
이 작품 전체가 키쿠오의 삶과 맞물린다. 그는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나 폭력의 세계 한복판에서 자란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는 가부키를 사랑하는 소년이 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키쿠오는 복수를 꿈꾸지만 실패하고 만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키쿠오는 기꺼이 그 문을 넘는다. 몸이 부르는 아름다움의 형태 속으로 걷게 된 것이다.
② 連獅子(렌지시-연사자) : 떨어뜨리는 방식, 혹독한 시련 속에서
가부키 집안의 대가 한지로와 그의 아들 슌스케가 등장한다. 키쿠오는 그들의 무대를 지켜본다. 이 시기는 키쿠오가 가부키 세계에서 ‘가문’의 자리가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지 깨닫는 시간이다.
연사자의 전설은 명료하다. 새끼 사자를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리고, 끝까지 올라오는 강한 새끼만 기른다. 영화에서 한지로의 사랑도 아비 사자의 형태를 띤다. 시련은 교육이면서 동시에 한지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슌스케는 아버지가 준 시련에서 도망치는 쪽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슌스케를 다시 올라오게 하는 사람은 키쿠오라는 점이다. 키쿠오의 재능은 생존인가, 슌스케의 혈통은 축복인가, 형벌인가.
이후 펼쳐지는 키쿠오와 슌스케의 인생이 혹독한 시련 속에 있다는 점은 모두 예측할 수 있다.
③ 二人藤娘(니닌후지무스메-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 함께 만드는 아름다움
이 공연에서는 키쿠오와 슌스케의 성공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둘이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무대가 화려한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에서 화려함이 나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고 위하면서 유명해진다. 가부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일상과 무대 전반에서 등나무 꽃향기처럼 퍼진다. 아름다움이란 혼자 소유하는 성취가 아니라, 함께 빚는 순간에만 잠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대 아래의 두 사람은 다른 일상과 현실에서 살아간다. 그 삶이 두 사람의 걸음을 다르게 걷게 만든다.
④ 二人道成寺(니닌도조지-도조지의 두 사람) : 뒤집힐 수 있는 아름다움
도조지의 전설은 사랑이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남자를 종과 함께 통째로 태워 죽인 여자와 숨은 남자 그리고 종을 공양하기 위해 나타난 시라뵤시(여자 무희)의 관계에서 시라뵤시는 남자를 불태웠던 여자의 혼령이었다.
무대에서 종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 공연이 영화의 중반에 놓인다.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계도 종(가문, 예술, 역할의 껍질)의 주위를 맴돈다. 누가 그 종 위에 올라서게 될 것인가, 누가 그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인가.
도조지에서 여자의 혼령은 결국 종 위로 올라가 뱀의 본성을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태워 사라지게도 한다. 각자의 아름다움이 타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⑤ 曽根崎心中(소네자키 신주-소네자키 동반자살) : 무대가 결심이 되는 지점
이 작품은 영화에서 두 번 공연된다. 첫 번째 공연은 한지로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키쿠오가 대역으로 서게 된다. 한지로가 아들에게 준 시련이었지만 그 순간 키쿠오와 슌스케 사이에는 금이 간다. 한지로는 연사자처럼 아들 슌스케가 벼랑에서 올라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한지로는 아들(혈통) 대신 배우(재능)을 택한다. 그 선택은 예술의 편에서 보면 숭고하지만 삶의 편에서 보면 잔인하다.
굳이 핏줄 대 재능이라는 틀로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원하기보다는 필요로 한다. 물론 키쿠오는 끝내 자기를 보호해 줄 핏줄을 갖지 못하고, 슌스케는 자기 안의 재능을 믿지 못해 도망치고 만다. 둘이 가진 결핍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보완하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비극 쪽으로 흘렀다.
공연의 줄거리처럼 도쿠베와 매춘부 오하쓰는 동반자살을 택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도 이 작품을 기점으로 삶이 하강한다. 이후 키쿠오는 한지로의 빚까지 책임지며 예인으로 살아간다. 자식과 아내까지 버리고서.
어느 날, 슌스케가 돌아오면서 키쿠오는 한지로의 후계 자리에서 밀려난다. 키쿠오는 살기 위해 식당 같은 곳에서 가부키 공연을 하고, 여자로 오해받을 만큼 아름다운 연기를 보이지만 취객에게 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키쿠오는 연기를 놓지 못한다.
분장도 지워지고 흐트러진 상태로 어떤 건물 옥상에서 가부키 연기를 하는 키쿠오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다. 예술에 사로잡힌 키쿠오의 광기가 집약돼 보이는 부분이다. 고독하고 깊은 슬픔을 경험한 자만이 진정으로 웃을 수 있는 것처럼 키쿠오는 멋이 아닌 두려운 아름다움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모방과 화려함에 매료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드디어 좌절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춰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슌스케는 키쿠오와는 다른 형태의 좌절을 내면에서 만나게 되고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기로 결심한다. 혈통이 준 시련, 당뇨합병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키쿠오가 간절하게 바랐던 혈통이 슌스케의 아름다움을 잘라낸 것이다. 슌스케는 한지로의 대역을 예인의 마지막 공연에서 하게 되지만, 슌스케만의 오하쓰를 연기한다.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된다. 키쿠오는 슌스케를 위해(혹은 함께 하기 위해) 자기 자리를 조정한다. 첫 번째 공연에서는 키쿠오가 여성 역할을 했다면, 두 번째 공연에서는 남성 역할을 한다. 툇마루 밑에 도쿠베를 숨긴 오하쓰가 도쿠베에게 “죽을 각오가 되었냐?”고 묻는다. 도쿠베는 오하쓰의 발목에 자기 목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각오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검게 변한 슌스케의 발이 아름다울 리 없다. 하지만 키쿠오는 슌스케의 마지막 무대를 함께 완성한다.
슌스케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현실의 삶으로 내려오지만, 그의 마지막 무대는 혈통의 자리가 아니라 슌스케다운 아름다움으로 진화한다. 키쿠오는 그런 슌스케를 끝까지 돕는다.
첫 번째 공연 때 분장실에서 슌스케의 핏줄을 갖고 싶다는 키쿠오에게 슌스케는 “넌 재능이 있잖아.”라고 위로했던 것처럼, 두 번째 공연에서는 키쿠오가 슌스케의 무대를 지탱한다. 둘은 마침내 관계를 회복하고 각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일상으로 돌아온다.
⑥ 鷺娘(사기무스메-백로 아가씨) : 사라짐을 통과한 사람만이 닿는 정점
이 공연은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키쿠오가 국보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 정점은 어릴 적 꾼 꿈이 아니라 처형에 가까운 삶의 무게 속에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각인된 장면’으로 남았던 무대가 어느 순간 ‘삶의 대가를 치른 사람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된 것이다.
만기쿠의 소멸을 곁에서 마주한 키쿠오는 드디어 국보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백로 아가씨> 무대에 오르기 전 키쿠오는 차 안에서 벚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을 본다. 하지만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무대 장치인 흰 종이가 눈처럼 날리는 순간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은 소유나 기록이나 저장이 아니라 소멸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순간을 견디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고통 없이 아름다움은 없다. 키쿠오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없었다면, 무대 위 찰나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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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소유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영화 《국보》가 끝까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국보가 된 결과가 아니라, 그 자리에 서기까지 한 인간이 얼마나 깎여나갔고 견뎌냈는지다.
<백로 아가씨> 무대 위에서 흩날리는 가짜 눈은 잠깐이지만, 그 눈을 가능하게 한 시간은 길고 무겁다. 키쿠오가 마지막에 “아름답다”라고 말했을 때, 그 감탄은 국보의 자리에 오른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잘라낸 것들에 대한 고백처럼 들린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진정한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곱씹어 보았다. 기쁨은 슬픔을 통과한 뒤에야 깊어지고, 관계는 고독의 바닥을 다녀온 뒤에야 단단해진다. 아름다움 역시 추함과 좌절을 외면하지 않은 시간에서만 생겨난다. 영화가 남긴 아름다움은, 결국 무언가를 견딘 시간의 기록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아름다움을 원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견딜 각오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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