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 망설임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폭력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리뷰 | 자파르 파나히 감독

by 데미안에너지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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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감각을 전이시키는 영화

에그발은 페르시아어로 ‘의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에그발(에브라함 아지지)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만삭의 부인과 어린 딸을 태우고 깊은 밤 도로 위를 달리다 개 한 마리를 치어 죽게 만든다. 이 첫 장면은 영화의 제목뿐 아니라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이 된다. 죽은 개를 두고 남자와 부인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남자의 인식―세상을 사소하게 축소하는 인식―이 타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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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이상이 생겨 가까운 정비소로 향한 남자는 의족을 차고 있었고, 그 발소리를 들은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공포에 휩싸인다. 처음에는 바히드의 반응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 저럴까? 하지만 그것은 내가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시각이 차단된 감각을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히드는 어둠보다 먼저, 형체보다 앞서, 발소리를 몸 전체로 감지한다. 감각이 청각밖에 없는 사람처럼. 에그발의 발소리는 금속처럼 차갑고, 기억의 틈을 긁어내 상처를 다시 터뜨린다. 영화는 바로 그 청각적 감각으로 관객을 설득해 나간다.

정비소에서 들은 발소리가 단순한 궁금증을 자아낸다면, 영화 마지막에 들리는 발소리는 순전한 공포로 변한다. 영화는 바히드가 느낀 공포를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시키며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감독의 의도를 거부할 수 없이 완벽하게 납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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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과 의심 그리고 망설임


바히드는 에그발이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자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난 뒤, 마음속에는 의심이 스며든다. 그래서 에그발에게 고문당했던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닌다. 사진 기사 시바(마리암 아프사리), 신부 골리(하디스 하크바텐), 신랑 알리(마지드 파나히), 시바의 전 연인이었던 하미드(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가 그 여정에 함께 있다. 여기서 신랑을 제외하면 모두 에그발한테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겉보기에는 로드 무비처럼 보이지만 고통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끔찍한 폭력을 어떻게 견디는지 보여준다.

가해자 에그발은 확신에 찬 인생을 살아왔다. 그의 태도는 권위적이고 가차 없다. 폭력이란 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피해자들은 다르다. 에그발을 본능적으로 기억하면서도 말을 하기 전 늘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에그발은 자신의 행위와 결과를 ‘어쩔 수 없는 그저 사고’로만 이해한다. 공무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히드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폭력의 세기 안에 갇힌 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고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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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드러나는 이란의 현실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무척 닮았다. 고문과 감시, 트라우마와 후유증, 아픔과 고통은 피해자들의 인생에 화석처럼 새겨진 끔찍한 경험들이다. 한국의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듯, 이란의 상처도 미래에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영화는 그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바히드는 자신의 망설임 때문에 에그발의 아내가 출산하는 과정을 돕게 되고, 결국 에그발을 풀어준다. 에그발이 고문을 행했을 때는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인간적 진실이 드러난다. 망설임은 약함이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힘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야기한다. 에그발이 잠시 승리자로 보이겠지만 진실과 진정성의 힘은 늦게 도착한다. 역사가 그러하듯.

영화가 한 인간의 확신과 의심 사이의 좁은 통로를 따라가는 이유는 망설임이 그들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진실은 감출 수 없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바히드의 뒷모습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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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폭력, 침묵 : 세 개의 그림자

영화에서 과거는 기억하는 것보다 더 어둡고, 현재는 믿고 싶은 것보다 더 불편하다.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지만, 파편 하나하나가 여전히 날카로워 혈관을 타고 생(生)을 지배한다.

영화에서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구조의 틈에 숨어 조용히 반복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인물들의 표정, 언어, 작은 몸짓 속에서만 그 흔적이 드러난다. 말해지지 않은 순간들, 가려진 장면들, 건너뛴 설명은 침묵의 지대를 만든다. 기억의 빈자리를 침묵이 채우고, 침묵의 무게 속에는 폭력이 살아남아 인물들의 삶을 잠식한다.

세 개의 그림자―기억, 폭력, 침묵―에 갇힌 인물들은 일상을 되찾지 못한다. 그래도 살아가려는 의지와 견뎌내는 몸짓을 보며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렸던 이들의 희생을 침묵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그들의 헌신은 잊어서도 안 되고 기록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들의 헌신에 감사함을 담아 미래로 전하는 것,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이다.

영화가 던지는 세 개의 그림자는 조용하지만, 이란 사회를 진동시키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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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상징적 의미 :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저’라는 말은 부사다. 부사는 문장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는 자리에 위치한다. ‘그저’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① 그대로 사뭇.

② 별로 신기함이 없이.

③ 무조건하고.

④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즉, ‘그저’라는 말은 사소함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구조가 숨어 있다. 큰일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말로 덮어 버리는 힘이다.

‘사고’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인생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 단순한 사고로 위장될 때, 그 말은 기억을 왜곡시키는 장치로로 작동한다. 떠돌이 개를 차로 치어 죽인 뒤 에그발이 가족과 나눈 대화처럼. 에그발에게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저 사고’다. ‘아무 일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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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의 흔적과 개인의 트라우마를 ‘그저 사고’라고 말하는 것은 권력이 폭력을 축소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그 말은 삭제된 책임의 빈자리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언어다. 면책만 받으려는 오만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감춰진 의도, 말해지지 않은 폭력 그리고 반복되는 자기기만―감독은 이 구조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낸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제목은 큰 사건을 사소하게 처리하는 언어적 폭력이며, 사소함을 가장한 가면을 벗기려는 감독의 시도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말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충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꺼내 보여준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말 뒤에는 말하지 못한 누군가의 인생이 길게 이어진다. 제목 뒤에 길게 이어진 꼬리가 영화 전체를 끌고 간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말은 책임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가장 어두운 침묵이다.

따라서 영화 제목은 변명이 아니라, 오히려 서늘한 자백에 가깝다. 진실의 경계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시작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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