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초판본 -「서시」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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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서시>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말을 담았다. 함축적인 시로 서문을 쓴 작가의 시력詩歷에 놀랐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현재의 자아! 현실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성찰적인 시다.
‘우러러’의 기본형은 ‘우러르다’이다. 뜻은 두 가지.(내가 왜 ‘우러러’라는 시어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시어가 마음에 들어왔다.)
①(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받들어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다.
②(사람이 무엇을) 위를 향하여 고개를 높이 쳐들다.
윤동주 시인은 중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본 시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종교적인 신을 보고자 했을까, 시대적인 아픔을 해결할 투사를 보고자 했을까?
조선 땅에 살지만 일본의 하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는 어떻게 견디며 살았던 것일까?
1941년 ‘우러러’ 볼 하늘이 없었던 시인은 어떻게 이런 어휘들을 선택해 시를 띄운 것일까?
아름다운 시인데 나는 질문이 많이 생겼다.
제국주의에 영혼을 잃어 ‘우러러’ 볼 하늘이 없었던 시대와 21세기 자본에 영혼을 잃어 ‘우러러’ 볼 하늘이 없는 시대가 만났다. 여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나 계엄까지. 그 영혼들이 ‘바람’에 스치나 ‘우러러’ 봐야만 볼 수 있는 하늘에 ‘별’이 되어 있다. 이 역설을 시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현실이 바람에 스쳐야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어린 왕자가 밤하늘 어딘가에서 빛을 내고 있듯 우리들도 ‘바람’에 스치며 ‘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장 먼저 ‘우러러’ 보기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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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대부분은 ‘자화상’을 남긴다. 화가들은 자신을 색채로 남기고, 음악가들은 자신을 음音으로 남기고, 작가들은 자전적 글로 남긴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을 색채와 글과 음으로 종이에 남겼다. 평면에 썼으나 입체로 돌아오는 것이 시詩다!
시인은 자신을 이렇게 들여다봤다.
‘미워하고 가여워하다 다시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추억이 된 사나이’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추억(나는 ‘추억’을 ‘사랑’으로 해석한다.)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건 깨달음의 영역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우주의 언어이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온다. 그래서 우주의 언어를 말할 때 인간의 언어는 힘을 잃는다. 단, 시인만 유일하게 그 언어를 글로 옮길 수 있다. 시는 사무사思無邪이고 시인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2’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子曰 : “『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자왈 : “『시』 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풀이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에 있는 삼백 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생각에 거짓됨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에 거짓됨이 없’으면 행동도 진실하다. 윤동주 시인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했지만 중심을 잃지 않았다. 조용하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찾아가 자신을 온전히,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 어디를 가도 일본의 땅. 어디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을 수 있었을까. 시인은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나도 혼자 조용히 명상을 할 때 비로소 나를 본다. 그리고 방전됐던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래서 늘 혼자 있고 싶어 혼자만의 공간을 원했다. 그런데 그 일에 공간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참 더디고 더디게 나를 찾아가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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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없이 거울을 보지만, 자기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시인은 우물을 거울처럼 사용했다. 그리고 ‘달’, ‘구름’, ‘하늘’, ‘파아란 바람’, ‘가을’을 본 후에 자신을 봤다. 주변을 먼저 들여다보고 인식해야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화상>을 입체로 그려놓았다. 평면에 글자들을 눌러쓰고 입체파 그림처럼 전체를 보여준다.
너무 가까우면 잘 보이지 않는 입체 그림들은 떨어져서 봐야 상이 제대로 전달된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 보려면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 자신과 조금 떨어져야 볼 수 있다. 연극무대에 오른 자신을 영상으로 찍어서 보듯이. 그 부끄러움을 이겨내야만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이 우물에서 봤던 모든 것들과 조우해야 ‘추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추억을 떠올릴 때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는 건 아니다. 그 당시 자신에 감정을 건드린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서 큐브처럼 덩어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 추억이다.
언제나 ‘사나이는 그대로’ 있었고 ‘사나이’가 ‘추억’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금 내 앞에 ‘달’, ‘구름’, ‘하늘’, ‘파아란 바람’, ‘가을’이 지나가고 ‘화자’의 얼굴이, 윤동주 시인이 그리고 내 자아가 지나간다. 멀리 추억처럼,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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