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책임 사이에서 우리는!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리뷰 | 감독 마틴 맥도나

by 데미안에너지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리뷰 내용, 6컷 만화로 미리보기!

“AI 생성 이미지입니다”

제목을 살피면 주제가 보인다


영화든 책이든 노래든 제목을 중요하게 살펴본다.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그 속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제목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작품의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영화는 제목(The Banshees of Inisherin)이 참 어려웠다.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의 작은 섬에 사는 밴시들. (s가 붙었다. 복수로 쓰인 걸 주의 깊게 봐야 한다.) ‘Banshees’의 사전적 의미는 '아일랜드 민화에 나오는 밴시(구슬픈 울음소리로 가족 중 누군가가 곧 죽게 될 것임을 알려 준다는 여자 유령)'을 말한다. 이니셰린 섬에 밴시들이 등장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23년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육지에서 들리는 대포소리가 이니셰린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쟁 중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누군가가 죽게 된다는 점이 공포로 다가온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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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다른 형태


예고 없이 찾아온 콜름(브렌단 글리슨-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무디 교수)의 절교 선언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파우릭(콜린 파렐)은 황망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이 영화에서 콜름과 파우릭은 극단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콜름의 실존

콜름은 파우릭과 맥주를 마시며 쓸데없는 수다를 떠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절교를 선언한다. 파우릭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천해 버린다. 콜름에게 실존은 무의미한 수다가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악을 남기는 것이다.

파우릭의 실존

그런데 파우릭의 실존은 다정함이다.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파우릭에게 관계는 곧 실존을 의미한다. 그 실존이 흔들리게 되자 파우릭은 콜름보다 더 극단적인 인물로 변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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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에 대한 책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세계관이 콜름의 입을 통해 영화 초반에 나온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내내 실존주의와 연결하며 봤다.(내 머리속이 바빴다는 말이다.) ‘책임감 없이 말하는 수많은 무의미한 수다’라는 말은 키르케고르가 한 말이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콜름은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꼈고, 자신의 실존을 증명할 작곡을 선택했다.


하지만 콜름의 실존은 파우릭에게 폭력이 되었고, 파우릭은 자신의 실존을 되찾기 위해 거짓말, 집착,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다. 파우릭은 콜름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한 행동이다. 파우릭의 여동생은 콜름과 파우릭 모두를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콜름의 실존주의 선언은 파우릭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관계를 앗아갔으며 파우릭은 자신의 실존주의를 위해 전쟁을 선언한다. 두 사람의 실존에는 오직 자신만 있었다. 자신처럼 타인도 실존적일 텐데. 결국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도 자신의 실존을 위해 파우릭을 떠나고 만다. 도미닉도 자신의 실존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니셰린의 밴시들은 모두 실존에 대한 책임을 죽음과 파멸로 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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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콜름의 절교 선언은 이니셰린에 죽음을 불러온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떠올랐다. 실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과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콜름도 파우릭도 제대로 실존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니셰린에는 밴시들이 존재한 것이다. 어쩌면 이니셰린 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밴시들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존재들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관계는 어떤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실존이 먼저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무자비한 책임’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실존은 무섭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의미한, 무책임한 행동들이 진실처럼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실존에 대한 책임감 없는 존재들은 모두 밴시들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가 당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모두 실존주의자가 될 수도, 밴시들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콜름과 그의 개, 파우릭이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실존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는 마지막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실존은 혼자면서 함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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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
참고로 이 영화에서 파우릭 역을 연기한 콜린 파웰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낸다. 또 콜름 역을 연기한 브렌단 글리슨의 묵직한 연기에 고맙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역을 연기한 케리 콘돈과 도미닉 역을 연기한 게리 케오간의 연기도 좋았다.
만약에 남우주연상을 준다면 두 명에게 주어야 한다. 물론 콜린 파웰의 연기력이 워낙 뛰어나긴 했지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은 포스터처럼.


P.S 2 :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는 원작이 희곡이라고 한다. 연극으로 작품을 관람했다면 생동감이 컸을 것 같다. 연극은 배우의 연기력에 모든 것을 더 의지해야겠지만.

✍ 다음 연재 – 도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 통합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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