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전집] 연재: 앤, 반짝이는 이름 #5

5권 『앤의 꿈의 집』 리뷰 |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by 데미안에너지

삶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


5권 『앤의 꿈의 집』 리뷰 내용, 4컷으로 미리보기!

“AI생성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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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을 향한 길버트의 사랑


3권 『레드먼드의 앤』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앤을 향한 길버트의 사랑은 알면 알수록 현실에선 드물 것 같다. 작가가 꿈꾸는 이상형을 그려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앤도 그런 캐릭터이긴 하다.

앤의 머리카락 색깔을 가지고 놀려서 석판으로 머리를 맞았던 길버트가 그때부터 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앤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인생을 열심히 살며 기다리고 견디는 모습까지, 『앤의 꿈의 집』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 속에 등장한다.


“덕분에 내 앞에 천국이 펼쳐졌어. 그 순간부터 내일이 기대되더라고. 그날 저녁 초록지붕집 앞까지 너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면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앤에게 용서를 받았으니까.”
(본문 38쪽)
‘앤을 아내로 맞이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앤의 바람대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앤의 기대를 져버리면, 앤이 생각하는 남편의 기준에 못 미치면 어쩌지?’
(본문 43쪽)
길버트는 이제 자신을 주저 없이 ‘유부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 앤은 여전히 연인이었고, 온전히 ‘내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마법 같은 집도 어쩌면 실제가 아니라 꿈일지도 몰랐다. 매혹의 힘이 흩어지고 꿈이 흩어져버릴까 봐 두려운 나머지 길버트의 영혼은 여전히 앤 앞에서 조심스러웠다.
(본문 281쪽)


길버트가 얼마나 앤을 사랑하는지 언뜻언뜻 언급되는 문장들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길버트의 이야기보다는 앤 중심으로 서사가 흐른다. 특히 이번에는 레슬리나 짐 보이드 선장이 중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가의 문체상 대화가 많은 편이긴 한데 길버트와 앤의 대화는 적은 편이다. 4권 『바람 부는 포플러나무집의 앤』에서도 길버트의 삶은 앤을 통해서만 전해질 뿐이었다. 어차피 전지적작가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앤한테만 집중된 서사 흐름이 안타깝기는 했다. 의사의 길을 가는 길버트의 삶도 궁금하고, 애이번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다이애나의 삶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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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L : 순수와 통찰 그리고 사려 깊음


『앤의 꿈의 집』은 25~27세(1890~1892년)까지 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는 능력이 탁월한 앤은 여전히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수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소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신혼생활을 현명하게 해 나가는 이야기여서 미소 지으며 읽었다.


앤은 순수함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 당시에 대학을 나왔고 소설가로 꽤 이름을 알리는 상태였다. 차분하게 자기의 인생을 살아오던 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생활을 하는 내용이니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모할 앤을 기대하며 읽었다. 다만 능력이 뛰어난 앤이 새댁이 되어 집에만 있는 게 안타깝긴 했다. 요즘 말로 재능 낭비처럼 보였으니까. 시대의 벽을 실감하면서 읽기도 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발랄하고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아이의 모습은 아니지만 사려 깊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지켜낼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 사람의 내면을 통찰하는 능력과 순수함은 통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길버트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길버트는 누구보다 앤을 잘 알고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앤의 기분을 살피면서 안정감을 준 친구이자 남편이 되었다.


앤은 타인에 대한 통찰력과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잘못을 인정하는 힘도 뛰어난데 길버트에 대한 감정만큼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드먼드의 앤』 결말 부분에 가서야 길버트에 대한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으니까. 자연, 관계,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낼 줄 아는 앤이 유독 길버트에 대한 감정에서만은 둔하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긴 하다.

결혼을 해서도 앤은 마음껏 공상하고 상상한다. 길버트는 그런 앤의 시간을 존중하며 진정한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앤은 포윈즈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집을 꿈의 집이라고 여기며 자기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꿈에도 희망을 물들이는 새신부가 된다. 앤이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공상이나 환상만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희망과 밝음을 퍼트리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어린 시절 앤에게 공상이 생존본능이었다면, 어른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는 순수함을 지켜내고 공상과 현실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게 해 주었다. 결혼한 앤에게 공상은 순수함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 절망과 슬픔, 좌절을 겪어야만 하는 어른의 삶에 꿈을 꾸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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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 : 삶은 우리에게 항상 말을 건다


레슬리의 서사가 워낙 비극적이어서 읽는 이를 통해 분노를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작가가 당시 캐나다의 일면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앤의 경우는 행복한 결말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도 등장시킨 것 같다.

그렇지만 앤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앤은 어릴 때도 힘든 상황을 견뎌내고 밝은 빛으로 바꾸기 위해 상상을 하고 노력했다. 이번엔 그 어떤 슬픔보다 커다란 고통이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아이 조이의 죽음이다. 삶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앤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만 작가가 그냥 쓱 넘어가 버렸다. 코닐니어의 쓸데없는 말은 한 페이지가 넘게 전개하면서 앤이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은 짧은 서술로 넘어간다. 길버트도 그 고통 속에 있었을 텐데 거기에 대한 묘사는 없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작가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작가의 인생이 레슬리 못지 않은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은 오래 다루지 않고 앤을 통해 꿈과 희망 쪽으로 집중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작가의 실제 삶은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작가의 삶을 이해하고 읽은 터라 그냥 넘어갔다.


앤의 고통 이후 레슬리는 앤에게 마음을 열고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타인의 고통에 함부로 위로나 조언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자식을 잃고 극복한 사람뿐이다.

앤의 인생이 레슬리와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해서 앤이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앤은 슬픔이나 비극을 기쁨으로 각도를 바꿔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은 앤을 더욱 성장하게 만든다.

앤의 공감능력은 부모로부터 받은 기질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레드먼드의 앤』에서 친부모가 살던 집을 찾아가 부모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얻게 되고 그 집에서 살았던 부모와 자기의 탄생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감사함을 깨달았던 앤이다. 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기질을 가지고 있고, 마릴라와 매슈의 사랑으로 지금의 삶을 이끌어낸 것이다.


앤은 삶이 말을 걸 때 외면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비극을 몰아내고 빛 쪽으로 나올 때 타인의 손을 잡고 함께 온다. 앤이 삶을 걸어가는 태도와 품격은 성장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빛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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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W :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앤처럼


앤은 꿈의 집에서 제임스 보이드 선장을 만나게 된다. 인간이 겪지 않아도 될 모험을 이겨내고 등대지기로 사는 짐 선장은 앤처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비춰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어른으로서 지혜까지. 길버트와 앤이 인생의 어른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다.

아름답지만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신혼집에는 과거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앤은 그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초록지붕집을 팔게 되었을 때 앤이 선택한 일을 봐도 알 수 있다. 앤은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은 공간, 자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을 그 어떤 보석이나 물질보다 소중하게 여길 줄 안다.

앤의 고향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애이번리가 된 것도 앤이 사랑하는 공간이 초록지붕집이었고, 그 공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쌓였기 때문이었다. 신혼생활을 하는 이 작은 집도 앤에겐 그런 공간이다. 물론 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 ‘호텔에서 열린 자선 공연’ 편과 ‘퀸스 학원의 겨울’ 편에서도 앤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물질적으로 호화로운 사람들의 삶이나 성공을 위해 타인의 기준에 자기의 삶을 맞추는 사람들과 달리 앤은 초록지붕집의 앤으로 사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과 감사로 여긴다. 숲과 개울, 사랑할 수 있는 풍경, 마음을 줄 수 있는 공간. 앤은 크기와 물질, 성공과 명성을 원하지 않는다. 작지만 소중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고, 명예롭게 사는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타인이 앤을 싫어하는 느낌을 받으면 그 사람을 욕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를 좋아할 수 있게 노력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상대에게 맞추지는 않는다. 자기 가치관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기도 한다. 길버트와 첫 만남이 그랬고, 조시 파이와 관계도 그랬다. 앤은 어떤 관계도 지혜롭게 풀어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앤의 삶이 빛날 수밖에 없는 것은 앤이 삶을 스스로 빛내는 등대이기 때문이다. 앤은 자기만 빛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빛으로 타인의 길을 비출 줄 아는 너그러움을 가졌다. 그 매력에 길버트도 빠진 게 아닐까.

길버트는 앤보다 세 살이나 위다. 앤이 11세 때 길버트는 14세였다. 그런데 세 살이나 위인 길버트와 학업능력이 막상막하였고, 영문학에서는 길버트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앤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 중학교 2학년보다 더 뛰어나다면? 길버트는 학교에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나이나 체격으로 보나 월등했으니까.) 강력한 라이벌이, 그것도 세 살이나 어린, 그것도 여학생이 생긴 것이다. 앤은 그렇게 자기의 존재를 타인에게 빛으로 비춰서 타인이 앤을 찾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루비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은 사람도 앤뿐이었다.(루비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작가에게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폐결핵이 환자가 많아서였을까?)

『앤의 꿈의 집』은 정서적인 밀도가 훨씬 정밀하게 다뤄졌다. 작가가 로맨스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삶의 기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대반전?^^(레슬리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이 있는 서사이기도 했다. 정말 소설 같은 설정이었다.

앤과 길버트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들의 삶을 어떻게 빛낼 것인지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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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까지 읽으면서 작가가 앤에 대해서 많이 사용한 단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장하는 앤을 묘사할 때 반복되는 말이 ‘앤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다’라는 구절이다. 작가가 꿈꾸는 이상형이 길버트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자기의 삶이 앤처럼 나아가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작가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작가처럼 앤을 탄생시킬 사람은 루시 몽고메리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작가에게 또 다른 빚을 지고 있다. 그의 작품이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순수함과 상상력을 지금까지 꺼내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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