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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ul 25. 2016

동사무소에서 자아 찾기

서울 여자, 도쿄 여자 #14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동사무소나 구청에 다녀오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불친절한 걸까요? 한창 혈기왕성하던 때, 저는 민원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민원이라는 게 뭐겠어요? 국민이 정부나 시청, 구청 등의 행정기관에 어떠한 것을 신청하는 것이 민원의 뜻이겠지요. 제가 민원의 여왕이 된 데는 솔직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동사무소나 구청, 혹은 시청에서 느낀 공무원들의 불성실한 태도는 항상 저 같은 사람을 파이팅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으니까요. 네 작가님. 저는 오늘 동사무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삶의 친절함이나 상냥함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래도 저는 눈은 맞추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면 눈을 맞출 생각도 없이 오로지 용건만 빨리 보고 가라는 태도를 보이는 직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들도 수많은 민원인들을 상대해야하니 피곤할거에요. 하지만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저는 종종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저기요, 아무리 바빠도 우리 눈은 맞추고 이야기합시다!’ 그렇다고 바로 수긍할 그들이 아니죠. 그럴 때면 힐끔 올려다보고는 금세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일이 예사인 사람들입니다. 아마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죠?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마음으론 타인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일본 사람들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아주 오랫동안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융통성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라는 말도 입에 달고 살았죠. 그런데 얼마 전 동사무소에서 재밌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그들도 흥미로운 일에는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결국 동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 사람들도 비효율적 시스템이라는 그물에 걸린 희생양인 걸까요? 폐쇄적인데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시되는 조직문화, 그리고 문책 받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일에도 연루되지 않겠다는 무사안일주의, 어떤 조직이든 항상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곳은 항상 그런 것들이 곰팡이처럼 퍼져있게 마련이니까요. 아무려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동사무소 직원과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주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사건에 휘말리게 된 걸까요?

     

시작은 친정 부모님에 관한 서류를 떼러 동사무소에 들른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곳에 대한 그다지 유쾌한 기억이 없는 저는 그날도 여차하면 한바탕 할 기세로 동사무소 직원을 찾아갔어요. 역시나 동사무소 직원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떼어달라고 요청한 서류는 호적등본이었는데요. 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일처리는 생각보다 아주 빨랐습니다. 몇 분 후, 신청한 서류가 나왔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어요. 원래 서류란 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 집만 그런 것인지, 친정엄마의 부모님, 그러니까 외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서류상은 어떤지 몰라도 외할머니는 제 기억 속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할머니가 된 엄마의 모습을 보면 외할머니의 얼굴과 표정, 몸짓까지 그대로 들어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아주 오래 전, 외동딸인 엄마를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보자기 한 가득 이것저것 먹을 것을 한 아름씩 안겨주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철이 없던 저는 오빠나 언니와 함께 그 보자기를 뒤져 맛있는 걸 찾아내 쾌재를 부르곤 했죠.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열흘 정도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할머니는 연신 김치나 오이소박이 같은 걸 담고 이런저런 전을 부쳐주곤 했습니다. 특히 깻잎 튀김은 정말이지 너무 맛있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어요. 약간 억세진 여름 깻잎에 녹말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겨낸 그 맛은 아무리 비싼 튀김집에서도 재현되지 않는 맛이니까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깻잎을 튀기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닭 벼슬처럼 늘어진 목, 그리고 오래 된 사각 고쟁이까지 제 기억 속엔 분명히 있는데 왜 서류상에 그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 걸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유는 이랬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 큰 할머니 뒤로 저희 외할머니가 새로 시집을 온 겁니다. 그러니까 둘 째 부인이었기 때문에 지금 서류에 그녀의 존재가 남아있지 않았던 거였어요. 물론 서류를 더 뒤지고 당시 자료를 추적해 가면 할머니의 이름과 흔적을 찾아낼 수야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냥 거기서 멈추기로 했습니다. 사실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도 동사무소 직원과 저는 하나가 되어 마치 007 미션을 수행하듯 자료를 뒤졌으니까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할머니의 존재를 찾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걸 보니 어느새 고마운 마음까지 들기도 하더군요. 아마 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등본이나 초본을 떼고 전입신고를 하는 판에 박힌 똑같은 일상에서 모처럼 일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할머니가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도 껄껄(저희 할머니는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니 웃음도 호호는 아닐 것 같아요) 웃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네 그래요 작가님. 그날 이후로 저는 동사무소가 아주 조금 좋아졌습니다. 몇 페이지의 서류 안에 존재하는 나와 우리 가족들만 아는 은밀한 역사를 그곳이 함께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흔한 서류상에 조차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서류에만 남아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불쌍한 사람들이 태반인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나를 기억하고 보고 싶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갈 때 마다 늘 불친절 하고 아주 가끔만 상냥한 동사무소, 언제나 정시에 문을 열고 정시에 문을 닫는 그곳, 하지만 동사무소를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나와 우리 가족의 일생이 지금도 조용히 잠들어 있으니까요.

     

서울 여자,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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