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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Sep 20. 2016

명절 후에 오는 것들

서울 여자 도쿄 여자 #21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긴 추석연휴가 이제야 끝이 났습니다. 올해 추석은 조금 색다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는 점에서 꽤나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될 것 같아요. 추석은 밝은 달을 보면서 노는 날이니 여자들을 더 이상 부엌에 가두지 말자는 모 칼럼니스트의 의견을 시작으로 온. 오프라인에서 전에 없이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관습을 버려야 한다, 제사에 올릴 전은 남자들이 부쳐라, 라는 내용의 기사나 칼럼에 많은 여자들이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며 환호를 보냈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미 그런 논쟁도 무의미할 만큼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럼니스트나 기자들은 그 흐름을 재빨리, 혹은 영악하게 읽어냈을 뿐이라는 거죠. 그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를 쥔 것도 아니고 결국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가는 건 오랜 세월 자기자리를 묵묵히 지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래요 작가님. 한국 여자들이 변하고 있어요. 그것도 엄청 빠른 속도로 말이죠. 일본 역시 이런 흐름으로 바뀐 지 15년 이상 되었을 거라고 봐요. 도쿄 주부에게 올해 추석은 어땠는지 궁금해지네요. 사실 전통이냐 합리냐를 떠나서 지금은 너무 좋은 계절 아닌가요? 지치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길목의 계절, 저는 명절에 대한 푸념과 논쟁 보다는 명절 이후에 오는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몇 해 전 부터 명절 연휴면 저는 목욕을 갑니다. 사실 요즘은 대중목욕탕에 갈일이 없잖아요. 대부분 욕실이 있는 아파트나 빌라에 살기 때문에 굳이 낡고 오래된 목욕탕에 갈 이유가 없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우연히 명절에 대중목욕탕에 혼자 가게 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실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뿌연 김이 오르는 대중목욕탕! 아주 어렸을 때 엄마는 명절 전이면 목욕탕에 데려가 눈이 빨개지도록(목욕 값이 아깝지 않아야 하므로) 때를 밀어주시곤 했어요. 그땐 명절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죠. 근심 걱정 없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을 수 있고, TV 채널마다 경쟁하듯 편성된 특선 영화도 맘껏 볼 수 있었으니까요. 사춘기가 되었을 때도 추석은 즐거운 날이었어요. 큰집이 아니라 제사를 지낼 일 없는 저희 집에서는 음식 해대느라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하는 엄마의 모습도 볼 수 없었고, 저는 친구들과 KFC에 가서 수다를 떨거나 15세 관람가 영화를 본 후 밤거리를 쏘다니다 집에 돌아오곤 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추석이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자리 잡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은 가물가물 해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십 년 만에 찾아간 대중목욕탕에서 명절임에도 좋은 기분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는 거죠. 네 그래요 작가님. 대중목욕탕의 무엇이 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대중목욕탕은 몇 가지 시설을 제외하고는 예전 그대로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커다란 온탕과 냉탕을 중심에 놓고 쭈그려 앉은 사람들의 묵묵한 풍경 같은 거 말이에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지만 때를 밀 때의 사람이란 누구라도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걸까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저마다 종아리나 허벅지, 혹은 팔 뒤꿈치의 때를 벗겨내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 그것은 무념무상, 완전 몰입의 상태로 보였어요. 저는 희뿌연 수증기로 감싸인 그 먹먹한 풍경 속에서 때를 미는 사람들의 뒤태를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무생각 없이 그들 사이에 앉아서 때를 밀기 시작했죠.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자리 잡은 명절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말이죠. 아, 그 여인! 그래요 작가님.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담담히 다가와서는 툭- 한마디를 던진 그 여인 말이에요.      


가릴 곳만 가린 채 맨몸으로 당당히 선 그 여인은 제게 무심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 때 민다고 하셨어요? 등은 만원, 전신은 이만 원이에요.   

  - 혼자 와서요. 등만 밀려고요. 

  - 아, 뭐하고 있어요? 돌아앉아 봐요.  

등을 밀어주겠다는 여인은 말이 짧았습니다. 그렇게 엉거주춤 앉는 자세를 취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제 등을 쩍! 하고 후려쳤습니다. 그리곤 지체 없이 연두 빛 타월을 양손에 끼우곤 곧바로 작업(?)을 시작하더군요. 제가 긴장했다는 걸 눈치 챘는지 그녀의 동작은 꽤나 섬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협동심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그녀의 손짓에 제가 고개를 젖힌다거나 등을 구부리거나 하는 동작들 말이에요. 그렇게 십오 분 정도가 조용히 흘러갔어요. 처음보다 꽤나 친밀해진 느낌이 들어(맨몸을 맞대서 일까요?>_<) 저는 아까보다 훨씬 다정해진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 정말 개운하네요. 그런데 이 일이 힘들지 않으세요? 

  - 뭐가요?

  - 남의 등을 밀어주는 것 말이에요. 

  - 서로 좋은 일이잖아. 나도 좋고 남도 좋고. 그럼 되는 거 아니야?

  - 그렇죠. 서로 좋으면 되는 거죠.      


그 순간, 저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한 기분이 들었어요. 남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 모두 철학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덥고 습한 김이 오르는 목욕탕을 빠져 나오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참 좋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나도 좋고 남도 좋으면 되는 것. 네 그래요 작가님. 어릴 때 추석은 마냥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는데 그런 좋은 감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랜 시간 무거운 마음으로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도 추석이 행복해 질수 도 있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저는 명절이면 혼자 대중목욕탕에 갑니다. 마음이 깃털처럼 폴폴 가벼워지기 위하여!     


서울 여자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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