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 도쿄 여자 #22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지난 주말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말이 낀 연휴였어요. 늘 그렇듯이 늦은 오후 극장을 혼자 찾았는데 그날은 유독 사람이 많더군요. 비가 와서 그랬을까요? 올 가을 가장 감성적인 프랑스 영화라는 카피에 매료된 사람들이,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 영화에 끌린 이유는 딱 한 마디의 대사 때문이었어요. 여자는 마흔 살이 넘으면 쓸모가 없어져. 그래요 작가님. 짧게 지나가는 영화 예고편에서 그런 대사가 흘러 나왔고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정말 여자는 마흔 살이 넘으면 쓸모가 없어지는 걸까요? 대체 쓸모란 무엇일까요? 쓸모, 쓸 만한 가치. 여자의 가치는 정말이지 젊음과 미모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저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오후, 홀로 극장을 찾았습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찾고 싶어서겠죠?
우선 영화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은 꽤 적절한 번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삶의 후반부, 그러니까 40대 이후에 만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것들-말하자면 늙음, 상실, 죽음 등을 감상적이지 않게 은밀하고 간결한 톤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요. 주인공은 철학교사인 나탈리 라는 여자였는데,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그녀의 가족이 프랑스의 해변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답니다. 어린 아이들과 남편이 함께 등장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여자의 인생에서 저 때가 가장 안정된 행복을 느끼는 마지막 시기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 말이에요.
네 그래요 작가님. 초겨울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바닷가 앞에 선 중년의 여자, 영화의 그 첫 장면과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만으로도 40대 이후 여자의 삶이란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일만 남았다는 것을 나지막이 속삭여 준다고나 할까요? 아이들은 자라서 주인공의 품을 떠나고, 25년 간 함께 지낸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을 해옵니다. 주인공을 낳아준 엄마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그녀를 내내 힘들게 하고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가장 소중했던 것들(가족)이 인생의 후반부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기려 그녀를 할퀴는 동안에도 주인공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그저 열심히 살아갑니다. 중년 이후 여자의 삶에서‘다가오는 것들’과 ‘멀어지는 것들’이 차곡차곡 제 머릿속에 쌓여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생이란 게 원래 이런 걸까요. 작가님? 모든 것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묘한 패배감마저 들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에도 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중년 여성들이 몇 명보이더군요. 하나같이 들키기 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휴- 인생 참 무.겁.다. 라고 말이죠. 네 그래요, 작가님. 마흔 이후 여자의 삶이란 아마도 그런 쓸쓸한 것인 모양입니다. 김빠진 맥주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극장을 나서는데 그 이유가 쓸쓸함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곧 알아차렸어요. 사실 패배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복감이죠. 그 사이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아무래도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가까운 일본 우동 집으로 향했어요. 그날따라 손님이 한명도 없었고, 말끔하게 생긴 청년인지 아저씨인지 모를 남자가 초밥과 우동을 내어주었습니다. 순식간에 영화의 잔상은 멀어지고 우동의 온기만이 제 주변을 감싸며 다가오는 순간, 네 그래요 작가님. 저는 그 순간 새 털처럼 가벼워지고 말았답니다. 이 넉넉함. 종잡을 수 없이 행복이 다가오는 듯 아련해지는 느낌, 겨우 공복감을 극복한 걸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정말이지 저는 알다가도 모를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 영화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눈 덮인 길을 걸을 때 흘러나오던 음악이 있어요, 작가님. 영국 가수 도노반의 ‘깊은 평화(Deep Peace)’라는 곡인데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며칠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 깊은 평화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공복감만 극복해도 다가오는 것들. 네 그래요 작가님. 이제는 멀어질 일만 남은 젊음, 예쁨 등은 우리 기꺼이 내어 놓기로 해요. 기꺼이...
서울 여자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