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 도쿄 여자 #24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주말이에요. 날씨가 쨍하니 화창하긴 한데, 막상 밖에 나가보면 바람은 아직 차갑네요. 주말이라 그런지 아파트 주변 골목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다들 봄나들이를 간 걸까요? 그런데 저는 주말에는 밖에 잘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일에 움직이는 것이 좋아요.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에는 곧잘 주말에 나들이를 갔어요. 행복하고 온전한 가정은 응당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듯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도 가고, 호수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좀 크고 보니, 모든 것들은 다 한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그때그때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때 해야 할 것들을 겪지 않으면 나중에 꼭 탈이 나니까요.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들어 일상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어요. 매일이 똑같고 새로운 일이라곤 없는 평범한 일상, 기대할게 없어서 그런지 아, 내 인생도 앞으로 이렇게 뻔 한 일만 남았나보다, 내심 기운 빠지는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요, 작가님. 기대하지 않을 때 불쑥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인생은 소설처럼 정말 재밌어요. 이래서 소설이 팔리지 않는 걸까요? 언제나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니 말입니다. 제가 얼마 전 겪은 일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게요.
지난번 작가님께 말씀드린 대로 제가 참여한 소설집이 출간이 되었어요. <호텔 프린스>라고 호텔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8인의 작가가 단편 소설을 하나씩 발표했고, 그걸 엮어서 소설집이 탄생한 겁니다. 무명작가인 제가 소설집에 참여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출판사로부터 이런 이메일이 왔습니다. ‘최주연’이라는 분이 작가님을 찾고 있는데 연락처를 알려드려도 될까요? 라고 말이죠. 최주연? 최주연이 누구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제 머릿속에 이십대의 여자 두 명이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저와 스물일곱 살의 최주연이라는 여자 말이죠. 네 그래요, 작가님. 17년 전에 연락이 끊긴 20대 때의 회사동료였어요. 순간 너무나 반가워 출판사에 연락해 그 분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고, 우리는 곧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답니다. 17년 만에 받은 메일에서 그 언니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회사 다닐 때 그렇게 서점을 들락거리며 소설책만 사들이더니, 작가가 되었다고?’
네 그래요, 작가님.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직장 생활을 했던 일 년 반, 결국 조직을 못 견디고 사고(?) 를 치고 나왔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언니와의 유쾌한 일들이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스쳐갑니다. 스물다섯, 스물일곱,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때 저는 대기업 L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대전지사에서 근무를 하면 전세아파트를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어요. 그 언니는 부산에서 대전으로 지원해 온 거였고, 저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지원해 간 거였어요. 난생처음 혼자 사는 아파트를 가지게 된 건데, 정말 딱 한 달 정도만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후는 날마다 술.술.술! 퇴근 후 술을 마시러 단골집에 가서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곤 아침엔 늘 술이 덜 깬 채로 출근을 했습니다. 누구도 나를 터치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는데 막상 자유가 생기니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권위적인 분위기의 회사가 싫어서 그만 둘 마음이 목까지 찼다가 월급날이 되면 그 마음이 쏙 들어가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겪게 되는 월급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1년 반이 흘렀는데, 제가 회사에서 남자 상사를 고발한 사건이 있게 되었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느낀 후, 저는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이후 그 언니는 호주로 유학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우린 그렇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물다섯 살, 스물일곱 살의 두 여자가 마흔 두 살, 마흔 네 살이 되어버렸네요. 지나고 보니 믿을 수 없이 빠른 시간들이에요.
호주에서 딸 두 명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 언니의 사진을 보니, 인생은 참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어디든 멀리 가서 살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저는 이렇게 15년째 같은 동네에서 옴짝달싹하지 않고 사는 반면, 쳇바퀴 돌 듯 사는 것이 적성에 맞을 것처럼 보였던 다소 보수적인 면을 가진 그 언니가 먼 바다를 건너 호주에 살고 있다니 말입니다. 며칠 전 다시 보내온 메일에서 언니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경희야, 조만간 호주에 한 번 와! 저는 이메일에 이런 답변(응, 언니 언젠가 한 번 갈께!)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호주가 어디 옆집이던가요?
작가님, 서울여자 도쿄여자를 우리 더 확장해 보면 어때요? 호주 여자, 러시아 여자, 상하이 여자까지! 인생은 때론 소설처럼 우연의 연속이니까요.
P.S : 그리고 작가님,
편지의 완성도(?)를 신경 쓰니까 더 쓰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이번 편지부터는 그냥 편하게 쓰려고 합니다. >_<
서울 여자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