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 도쿄 여자 # 23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긴 겨울이 끝이 나고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글을 쓸 의욕도 없었어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사건들로 인해 나중에는 엄청난 일이 벌어져도 거의 아무렇지 않을 지경이 되더군요. 그래요, 작가님. 가을부터 겨울까지 아주 춥고 긴 시간이 지나갔어요. 주말이면 사람들은 늘 광화문에 모여들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딱 두 번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출판사 분들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만나 촛불행렬에 참여했지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우리는 손을 놓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뜨겁고 한편으로는 혹독한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부터가 시작이지만 말입니다. 지난겨울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해요. 그것보다 우리의 사소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기로 해요.
작가님이 겨울 내 만보씩 걸었다는 글을 보았어요. 루틴! 요즘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 지점이에요. 우리처럼 고정적으로 출근할 곳이 없는 프리랜서들, 혹은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이것 같아요. 뭔가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행동들 말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꾸준히 하는 반복적인 습관 하나는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무조건 씻고 밖으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딱히 갈 곳이 없어도 무작정 나오는 거예요. 약속이 없어도 나와야 해요. 그러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다 보면 반드시 밀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기력이에요. 요즘 드는 생각인데 무기력이 가장 무서운 놈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침엔 무조건 나옵니다. 커피를 마시든, 도서관에 가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든, 출근할 곳이 있는 사람처럼 집을 나오는 거예요. 또 다른 루틴은 뭐가 있을까요? 아! 저는 생수를 먹지 않고 보리차를 끓입니다. 지인인 동네 아줌마 J는 이런 첨단의 시대에 보리차 따위나 끓여 먹는 촌스러운 여자라니! 라고 장난삼아 말하지만 이건 이미 루틴이 되어 바꿀 수 없는 습관이 되고 말았어요. 아, 귀찮아! 다시는 보리 물을 끓이지 않을 테야, 라고 매일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요. 루틴이에요. 이렇게 일상 속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하는 일들, 행동들, 가는 장소 등이 요즘 저를 지탱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몇 년 전, 어떤 소설에서 그런 문장을 읽었던 것 같아요. 영감보다 중요한 건 습관이다! 그래요, 작가님. 30대에는 내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40대에 접어들면서 영감만큼이나 중요한 건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나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습관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도쿄에 사는 작가님은 어떤 루틴을 갖고 계신가요?
서울 여자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