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01
도쿄여자 김민정작가님!
어릴 때는 죄다 골라내고 먹다가 언제부턴가 더 많이 더 수북하게 넣어야 제 맛인 것, 그래요. 대파가 주는 알싸한 그 맛! 저는 지금 파에 대한, 아니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며칠 전 일이에요. 날이 너무 더워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을까 하다가 왠지 기운도 없고, 뭔가 힘이 나는 걸 먹자며 친구(동네 아줌마)와 설렁탕을 파는 식당에 갔었어요. 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금세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그릇을 앞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한 행동이 뭔지 아세요? 바로 송송 썰어 놓은 엄청난 양의 파를 설렁탕에 투척했다는 것! 우와~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파를 좋아했었지?
사실 아주 오랫동안 ‘파’라는 식재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어릴 때는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에서 파를 걷어내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가 저였으니까요. 파가 좀 들어가 줘야 맛이 살아나는 음식은 왜 또 그리 많았는지, 엄청 귀찮은 일임에도 저는 파를 죄다 골라내고는 투덜대며 밥만 먹곤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랬던 우리가 언제부터 파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설렁탕이 식는 줄도 모르고 동네 친구와 저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우리가 파에 매료되기 시작했다는 것! 그날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친구가 이런 말을 덧붙이더군요. 파라면 모조리 골라내던 우리가 파 맛에 눈을 뜨다니, 아 왠지 슬퍼지는데!
작가님이 보낸 편지-‘끝내주게 산다는 것’을 읽다가 마흔 살 생일을 맞은 부분에서 저는 파의 맛처럼 알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어요. 마흔 살이 되면 홀로 쿠바의 아바나에서 뜨거운 커피나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있을 줄 알았다는 그 말! 그래요 마흔...우리가 어느새 불혹의 나이 마흔이 되고 말았어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혹이라더니 어쩜 이리도 욕망이란 가실지 모르는지! 어째서 더 가고 싶은 곳(요즘 저는 아이슬란드를 꿈꾸고 있어요)은 많아지고, 왜 하고 싶은 일도 많아지는 건지, 물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말이죠. 이럴 땐 쿠바나 아이슬란드는 잠시 잊고 알싸한 파 맛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연두 빛 파가 수북이 올라간 한 그릇의 음식, 굳이 표현하자면 그게 중년의 맛이 아닐까요? 어릴 때는 죄다 골라내고 먹었던 것, 그런데 언제부턴가 알싸한 풍미로 음식을 감싸는 포용력 있는 파의 맛이 좋아지는 것 말이에요. 그래요. 파가 좋아진 것처럼 도리 없이 우리는 마흔 살이 되고 말았어요.
고백하자면 저는 마흔이 되는 것(=중년이 되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마흔 살이 되어 추해지기 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해야지, 라고 열일곱 살 때 일기장에 적기도 했으니까요. 아마도 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웃기죠? 서른일곱에도 서른여덟에도 마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니! 그런데 도리 없이 마흔 살이 되고 말았어요. 인생이라는 게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요? 네 그래요, 작가님. 그때 함부로 내뱉었던 ‘치욕스럽다’는 말은 슬며시 취소하려고 해요. 이렇게 건강하고(누군가는 제게 기골이 장대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멀쩡한데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찌하면 치욕스럽지 않게 인간다운 모습으로 나이들 수 있을까, 요즘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2014년 6월, 그러니까 서른아홉과 마흔 사이의 경계에서 제가 부탄에 다녀오게 된 것도 그런 물음에 대한 연장선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커다란 가방을 멘 어깨가 굽은 아이들의 자리를 뺏는, 그런 심술궂은 중년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스스로 책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뻔뻔한 중년도 되고 싶지 않고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치욕스럽지 않은 중년, 품위 있는 어른 여자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고민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며칠 뒤 저는 동네 친구와 다시 설렁탕집에 마주 앉게 될 것 같아요.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음식 앞에서 우리는 재빠른 속도로 엄청난 양의 파를 투척하고 있겠지요? 그 친구는 제게 이런 말도 덧붙일 것 같아요. 이거 너무 맛있지 않니? 이젠 파를 넣지 않은 음식이란 상상할 수도 없어! 아마도 저는 이렇게 맞장구를 치고 있지 않을까요? 맞아, 파의 중요한 맛도 모르는 어린애들 같으니라고! 우리는 맛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어쩐지 어른이 된 것 같은 알싸해진 기분을 느끼면서 호호 불며 음식을 다 비워내겠지요? 어릴 때는 죄다 골라내고 먹던 것, 어른이 되고나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그것, 파의 맛!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중년이 되어가는 요즘, 저는 파의 맛이 마음에 쏙 든답니다!
서울 여자,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