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커피, 로미타샤를 만나다

서울여자 도쿄여자 #03

by 김경희

도쿄 여자, 김민정 작가님!


한때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를 반복해서 읽던 시절이 있었어요. 왜 그렇게 서른이라는 나이에 집착을 했을까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를 읽고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우수에 젖어 방황하던 시절들! 서른의 잔치도 끝난 지 10년, 하물며 마흔은 어떻겠어요. 잔치는 물론이고 뒤풀이까지 끝난 게 요즘 우리의 일상이죠. 술은 죄다 동이 나고 안주도 떨어져 지갑마저 텅 비어버린 마흔이라는 나이. 그런데 재밌는 건 잔치가 끝나고 뒤풀이도 막을 내렸을지언정 인생에는 커피 타임이 남아 있다는 사실! 달리 특별한 취미도 없고 씀씀이도 크지 않은 제가 유일하게 사치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책과 커피에요. 책은 읽던 안 읽던 끌리면 무조건 사들여 쟁여두는 사람이 저랍니다. 그리고 두말 할 것도 없는 내 사랑 커피! 커피는 정말 자식만큼이나 좋아요. 가방이나 구두를 사지 않는 대신, 저는 커피 값은 아끼지 않고 마시는 편이랍니다. 네 그래요. 제게 있어 커피란 서늘한 욕망을 견디게 하는 검고 뜨거운 무엇! 그러니 잔치나 뒤풀이도 모두 끝났지만 우리 커피만은 포기하지 않기로 해요.


제 인생의 첫 커피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처음 커피를 마셔본 건 입자가 고른 인스턴트 가루커피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오빠에게 시험기간에만 허용된 각성제 같은 용도의 커피였을 거예요. 작가님도 그런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인스턴트커피 한 스푼에 보드랍고 뽀얀 크림(일명 프리마)을 세 스푼 정도 넣어 휘휘 저어준 커피도 무엇도 아닌 기묘한 음료! 제 인생 커피는 그렇게 아마추어처럼 시작되었어요. 부모님 몰래, 오빠나 언니 몰래 야금야금 타먹던 인스턴트커피의 맛!

그렇게 누구에게나 인생 커피가 다가오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리고 사랑이 지나가는 것처럼 인생 커피가 지나가고 또 다른 인생 커피를 만나는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사실 요즘 커피가 지루해지고 있었어요. 커피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어떤 날엔 하루에 열잔을 마시기도 했어요.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되고 그러다보니 대 여섯 잔을 마셔도 개운하지 않은, 말하자면 커피가 시들해진 그런 때. 그런데 말이죠. 어제 인생 커피를 다시 만나고 말았어요. 그 커피의 이름은 로미타샤(Lomi Tasha)! 어때요? 이름도 정말 근사하지 않나요?


로미타샤를 두고 누군가는 궁극의 신맛이라고 표현하더군요. 레몬이나 라임향이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 식어버린 후 입안에 머금고 있을 땐 박하 향이 나는 것도 같았어요.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처음 원두커피를 맛보았을 때 꽤나 엣지있는 척을 하던 직장 선배는 제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인생의 쓴 맛도 모르는 네가 커피 맛을 안다고? 네 그래요. 서른도 안된 제가 어떻게 인생의 쓴 맛을 알 수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마흔, 이제는 누구도 제게 인생의 쓴 맛을 운운하지 않네요. 음, 어째 그 사실이 더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어제의 커피 향이 남아있는 오늘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왜 로미타샤라는 커피가 그토록 색다르게 다가왔을지 말이에요. 그 커피를 만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어요. 그리고 그 커피를 마시러 모인 사람들도 거짓말처럼 약속도 없이 만나게 된 사람들이고요. 로미타샤라는 커피를 내려준 그 분은 커피 트럭을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여행 생활자에요. 커피 트럭의 이름은 풍만이, 낡고 허름한 노란색의 그 트럭은 제주도와 서울,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리지 않고 이동하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고 해요. 그런데 어제 그 트럭이 저희 동네에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는데 특별한 약속 없이 모인 그들은 나이대가 서른에서 오십까지 제각각이었어요. 그 중에는 이혼을 하루 앞둔 여인도 있었죠. 정말로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완벽했어요. 지루한 일상에서 인생 커피를 만나기에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저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셨어요. 물론 사이사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주로 커피 맛과 그동안 자신이 마신 커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커피가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말이에요. 누군가는 이런 커피를 마셨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하더군요. 커피 트럭을 몰고 온 그 남자는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도 낼 수 없는 커피 맛이 있다는 말을 했고요. 그래서 커피는 매력적인 것 같아요. 커피 맛 자체도 중요하지만 함께 마시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처한 상황, 혹은 그들의 감정 상태나 공간의 분위기가 그날의 커피 맛을 좌우하기도 하니까요. 커피 맛도 모르고 인생도 몰랐던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젠가 작가님도 ‘로미타샤’를 만나보길 바래요. 너무 화려해서 조금은 슬픈 맛의 커피. 아무래도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하는 이런 커피는 매일은 좀 곤란할 것 같죠? 음 마흔이 되어도 겨우 이 정도라니, 이건 꼭 갖지도 못할 연인을 대하는 꼴이군요!


서울 여자, 김경희

keyword
작가의 이전글땡스 마마(Thanks Ma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