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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Apr 13. 2020

[제주 4.3] 기억해야 할 북촌리 학살 사건

 나는 제주의 4월을 생각할 때면, 동백꽃의 붉은 빛깔과 함께 '북촌리 사건'을 떠올린다. 북촌리는 제주 조천읍 동쪽 끝에 위치한 평화로운 해안마을이다.


 1949년 1월 17일, 대한민국 국군 2연대 소속 군인들이 북촌리를 경유하여 함덕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에 남로당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군인 2명이 사망했다. 이에 북촌리 마을 유지 10명이 군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덕 군 주둔지에 전달했다. 그러나 분개한 군인들은 느닷없이 마을 유지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족 중 경찰이 있는 1명을 제외한 9명을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 북촌리는 빨간 마을이었다. 마을 유지들을 살해한 국군 2연대 군인들은 무장한 후 북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촌리 마을에 당도한 직후부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50여 명의 주민들을 움푹 파여있는 '옴팡 밭'으로 끌고 갔다. 다른 40명의 주민들은 파묻기 쉬운 모래밭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날 대한민국 국군은 하루 종일 학살을 지속했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학살 중지명령이 내려졌다. 군인들은 남은 주민들에게 함덕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함덕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군인들은 함덕으로 집결한 주민들 중 30여 명을 더 학살했다. 이날까지 이틀간, 대한민국 국군이 학살한 북촌리 주민은 약 400여 명이었다. 나는 이 정도로 많은 비무장 민간인이 이틀 만에 살해된 사건을 나치 절멸수용소와 일본 제국의 난징대학살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한다. 마을 주민들은 몇 달 뒤에야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임 당한 아이들의 시신은 구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 넓은 돌밭이라는 뜻을 가진 너븐숭이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날 이후 주민들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슬픔은 눈물과 한숨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현기영의 말처럼 "4.3의 슬픔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촌리 학살사건을 다룬 그의 소설 <순이삼촌>만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유족들은 그날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유족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날 7살을 넘기지 못한 동생 3명을 잃은 김석보씨가 초대 유족회장을 맡았다.


 이후 북촌리에는 현기영이 글을 쓰고 김석보씨가 글씨를 쓴 위령비가 세워졌다. 앞면에는 당시까지 밝혀진 북촌리 4.3 희생자 439명의 성명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아래와 같은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너븐숭이에 세워진 위령비

"오호라!


무자년 섣달 열 아흐레 날(음력 48년 12월 19일) 그날의 참사를 뉘라서 잊을 것인가!


포악 무도한 세력의 사나운 총구 앞에서 439명의 무죄한 촌맹이 한날한시에 쓰러져 가던 그날. 불타는 마을의 충천하는 붉은 화광과 벼락 치는 총성 속에 낭자한 통곡과 비명들이 하늘을 찌르던 그날을 뉘라서 잊을 것인가!


역대 독재정권들이 반세기에 걸쳐 그 참사의 기억을 말살하려고 무섭게 금압 했지만 과연 그것이 잊혀졌던가. 이제 우리는 무자년의 그 참사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 돌을 세운다.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 영구 불망의 돌을 세운다."


4.3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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