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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Oct 04. 2020

'보건교사 안은영'에 대한 개인적 해석 (스포 포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다.


 안은영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그의 세계에는 '젤리'로 묘사되는 기묘한 존재들이 있다. 작중 대사에 따르면 그것은 '욕망'의 흔적. 개중에는 사람을 해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젤리도 있다. 은영은 사립고등학교인 목련고에서 보건교사로 일한다. 그는 학내 구성원들의 건강을 지키는 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젤리들을 제거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비밀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씨발.


 '목련고' 역시 하나의 욕망의 흔적이다. 지하실에 있는 압지석(壓池石)은 학교 부지에 위치하던 연못을 틀어막고 있다. 그 연못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젊은이들이 몸을 던지던 곳이었다. 그 젊은이들이 겪었던 상실감은 드라마 1화에 묘사되는 오승권의 감정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욕망의 가장 가혹한 일면이 응축되어 있던 연못의 봉인이 풀리자, 학생들은 몸을 던지기 위해 옥상으로 달려간다. 은영은 그들을 위해 괴물을 물리친다.


 몇 해 전 사망한 학교재단의 전직 이사장은 "숨구멍을 다스리면 대운을 바꾸고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연못 부지에 학교를 세웠다. 그래서 목련고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들의 거대한 상징이다. 오직 나쁜 젤리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안은영만이 학교의 어두운 욕망에 맞서고 있다. 은영은 학벌을 얻기 위해 학생들이 훔쳐온 방석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젤리들을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매켄지를 막아선다.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기준으로 학교를 바라보지만, 은영에게서는 욕망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괴물을 마주한 은영이 내뱉는 "아, 씨발, 더럽게 좆같네"라는 말은, 숭고하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영화 '하녀'의 김기영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몸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이 문장은, 그 어떤 인간도 욕망을 거스를 수 없음을 은유했다. 제 아무리 숭고해 보이는 인간이라도, 한 꺼풀 벗겨내면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은영은 그런 욕망의 세계를 마주하며 자주 괴로워한다. 얼마 후 은영에게 옛 친구 강선이 찾아온다. 은영을 이해해준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던 강선은 이미 크레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강선은 은영에게 학교를 그만두라고 한다. 은영은 그만두고 싶다고, 다 그만두고 싶은데, 피할 수 없어서 당하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날 이후 은영은 한동안 젤리를 보지 못한다.


백혜민, 보건교사 안은영 ⓒ 넷플릭스


 학교 지하실에 위치하던 압지석이 뒤집힌 이후 학교에 '옴'이라는 이름의 벌레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것들과 함께 학교에 '옴잡이' 백혜민이 나타난다. 혜민의 사명은 오직 '옴'을 먹어치우는 것, 그는 5.38km 반경에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하며 옴을 스스로의 위산으로 구제해왔다. 은영은 사명만을 위해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는 혜민의 운명을 거부하기로 한다. 그래서 혜민에게 "너만 생각하라"고 이야기하고, 끝내는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은영은 본인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혜민을 통해 욕망한다. 이제 혜민은 사명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은영은 끝내 사명을 택한다. 사직서를 내고, 능력도 없어졌다고 항변하지만, 결국 학교에 남아 다시 지하실에 들어간다. 은영은 인표와 함께 압지석을 완전히 제거하고 학교를 무너뜨려버린다. 은영은 그 직후 보건실로 달려가 후회한다. 보건실에 놓여있던 장난감 칼은 이전과 같은 불빛을 내며 빛난다. 은영은 장난감 칼을 들고 흐느낀다.


 이 작품에는 곱씹을수록 슬퍼지는 대목이 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런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차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안은영과 백혜민. 두 사람을 생각하며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언제나 거름을 뿌리는 사람과 열매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와 싸우지 않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사실 이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젤리가 안 보이는 세상은 정말 특별했다. 고요하고 참 편안했다. 모든 색깔이 조화롭고 모든 모양은 완벽했다. 잠깐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나를 계획한 누군가는 결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왜 내게 숨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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