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보다 무서웠던 트레블링카, 헤움노,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얼마 전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봤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소재로 차용한 영화인데, 그곳을 포함한 나치 절멸수용소에 대해 생각하면 극한의 공포감이 밀려온다. 가스실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물건을 정리하고 돈을 세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꾼다. 심지어는 학살에 앞서 성폭력까지 한다. 공장식 학살의 이면에서 이득을 보며 삶을 즐기면서 자신이 삶이 벽 안의 삶과는 무관한 듯 행동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장 무서운 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가 그나마 살아서 그곳을 나갈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의 사망률은 90%에 가까웠기 때문에 10명 중 1~2명은 생존했다. 그러나 나치가 1942년 이래 주로 폴란드 땅에 건설한 다른 절멸수용소들은 그렇지 않았다.
1942년 나치는 유대인과 소수자들을 모두 죽이기로 결정하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헤움노,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등의 절멸수용소를 각지에 건설한다.
이곳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달리, '제거'만을 목적으로 했다. 나치는 이송자들에게 강제노동을 부과하지 않았다. 이송된 이들이 수용소에 도착한 직후 모두 살해했다. 그야말로 인종 청소만을 목적으로 한 수용소였다. 이 과정에서 나치는 인류 최초로,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학살 역량을 구현했다. 이것은 확실히 근대적이었다.
초창기에는 총으로도 죽여 본 나치였지만, 이것이 병사들의 정신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방식을 바꿨다. 나치는 학살 과정에 독일인의 손을 얹지 않았다. 존더코만도라는 유대인 학살 업무 수행인을 선발해 분업화된 학살 업무를 맡겼다. 학살에는 독가스나 일산화탄소(가솔린 엔진)를 썼다. 사망자들은 모두 질식해 숨졌다. 당연하게도 존더코만도들 역시 조금씩 교체되며 학살됐고 수용소 폐쇄 직전 모두 제거됐다.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업무를 나눈 나치는 기차역에 도착한 이들에 대해 독일인 A가 짐을 놓게 하고, 독일인 B가 특정 조건으로 존더코만도를 뽑고, 독일인 C가 학살터로 유도하고, 존더코만도 D가 가솔린 엔진을 켜고, 존더코만도 E, F, G, H, I가 시신들을 꺼내고, 이어서 다른 존더코만도들과 함께 매장하는 식으로 일했다.
당연히, 더 윗선에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윗선은 유대인과 소수자들을 철도망을 통해 이송시킬 계획을 짜는 등의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는 불과 이틀 사이에 '5만 명'의 생명을 소멸시킬 수 있는 학살 역량을 구축했다.
나치는 기차역에 도착한 수용자들 중 존더코만도 몇 사람만 선발한 후 나머지 수용자들을 밀폐된 공간에 넣었다. 그리곤 그 옆에 달린 가솔린 엔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생성해 주입했다. 모두 죽었고, 모두 제거됐다. 그야말로 인간의 신체 특성을 적극 활용한 근대적인 학살이었다. 이송으로부터 3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송자의 거의 대부분이 사망했다.
나치 절멸수용소 중에서도 큰 규모의 수용소였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사망률은 99.993%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는 사망자 수치를 최소한의 범주에 둔 후, 생존한 수십 명을 분자로 올려 계산한 거라 실제 수치보다 높을 것이다. 트레블링카에서는 존더코만도들의 봉기로 수십 명의 생존자가 생긴 것 외에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나치가 절멸수용소에 보낸 유대인들의 숫자가 드러난 유일한 문서인 회플러 전보에 따르면 1942년 7월부터 가동된 트레블링카에는 그해 마지막 날까지 71만3555명이 이송됐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제거된 후 시신마저 완전히 소멸됐다. 같은 문서에 따르면 그해 말까지 나치 절멸수용소에 이송된 인간은 127만4166명이다.
나치는 이 같은 방식으로 절멸수용소를 가동해 도무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최소 350만 명으로 추정되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인간들을 학살했다.
1943년 중순에 이르자 폴란드 땅에는 죽일 유대인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 전 폴란드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나치의 학살로 폴란드의 유대인 인구 비중은 2020년대에 이른 현재까지도 1%에 불과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1994년 현재 폴란드에 남은 유대인은 4천 명에 불과하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후 나치는 5개 절멸수용소를 폐쇄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기적은 없었고 학살은 모두 수행됐다. 인종 청소는 완료됐다. 그리고 철저한 증거 인멸 탓에 오늘날까지도 그곳의 실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추정에 머무른다. 사망률이 99.993%인 상황에서 수백만 명 중 겨우 살아 남은 수십 명의 이야기는 그곳의 진짜 이야기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광주 인구와 비슷한 수준의 사망자가 나온 상황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단 수십 명이 대변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트레블링카의 실상을 아는 누군가에게 아우슈비츠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분명 아우슈비츠를 택했을 것이다.
절멸수용소는 Extermination camp의 번역인데,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 '수용'은 없었다. 노역도 없었다. 그곳은 단지 절멸학살소였으며 트레블링카에 당도한 이들의 99%는 그곳에 도착한 후 3시간 안에 모두 제거됐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운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상당한 사람들이 생존한 곳이 됐다. 사망률이 90%에 가까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다른 절멸학살소에 비해 '그나마' 생존자가 있었다. 덕분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같은 책도 빛을 봤다. 이번에 Open AI의 샘 올트먼은 이 책을 본인의 인생 책으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된 수백만 명에게는 그럴 기회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는 1945년까지 학살을 지속했다. 그러다 보니 패전을 앞두고 증거를 파기할 시간이 부족했다. 1945년 1월 26일, 소련의 붉은군대가 동부전선을 돌파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점령했다.
이렇게 글로 정리해 봐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대체 어떤 일이었는지, 수백만 명이 그런 식으로 '제거'된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우슈비츠가 '가장' 끔찍한 곳으로 알려진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른 곳들에선 그곳의 끔찍함을 증언해 줄 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아우슈비츠를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로 안다.
그리고 숫자 너머의, 그곳의 진짜 실상은 여전히 조금도 알지 못한다. 가장 무서운 건 이게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42년은 워렌 버핏이 '시티 서비스' 주식을 매입한 해였다. 그 시절에 첫 투자를 한 사람이 여전히 살아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의 동시대성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