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에도 각지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며칠 후, 고려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고,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서 억압에 항거했다. 그러나 집단적인 저항을 진행할 수 없는, 칠흑과 같이 어두운 시점이었다. 한국사회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신군부는 차근차근 국가권력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8 직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당연히 5·18 당사자들이었다. 5월 29일, 5·18 사망자 유가족들이 126구의 시신을 망월동 묘역에 안장한 후 위령제를 거행했다. 이틀 뒤, '5·18 광주의거 유족회' (초대회장 박찬봉)가 결성되었다.
유족들은 긴 싸움이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항쟁에 연루되어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광주에는 본보기로 수십 명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5.18 직전까지 녹두서점을 통해 사회과학 서적을 보급해왔던 김상윤의 아내이자 중학교 역사교사 정현애는 5월 17일 예비검속으로 남편이 구속된 직후, 5·18에 뛰어들었다. 그는 직접 검은색 천을 구해 전남도청에 조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정현애는 5월 27일 도청진압 직후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상무대 영창에 끌려오니 남편이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수사관들이 정현애에 대한 동정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던 정현애의 남편 김상윤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수사관들은 부부 중 한 사람은 빼줘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현애는 곧 광산경찰서로 이감되었다. 군부는 5·18에 연루된 여성들을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분리 수감했다.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던 박영순, 5·18 기간 내내 차량에서 방송을 해왔던 전옥주와 차명숙, 그리고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에게 체포된 여성들이 그곳에 있었다. 정현애는 9월 5일 자로 풀려났다.
정현애가 석방되던 시점에는 이미 5·18 구속자 가족 간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홍남순 변호사와 명노근 전남대 교수의 아내였던 윤이정, 안성례 여사가 모임을 주도했다. 안성례 여사는 5·18 기간 내내 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호소를 듣고 병원을 찾아와 헌혈을 했던 고등학생 박금희가 헌혈 직후 총에 맞아 다시금 병원으로 실려오는 광경을 눈물을 흘리며 목격하기도 했다. 이들 모임에 정현애가 합류했고 구속된 시민들의 가족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항쟁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끌려간 이들은 주로 남성이었기 때문에, 구속자 가족모임은 주로 여성들이 주도했다. 윤이정, 안성례, 정현애 세 사람이 대표와 총무 등의 직책을 나누었고, 본격적으로 5·18 구속자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모든 저항이 봉쇄되었던 서슬 퍼런 전두환 집권 초기, 이들의 활동은 사실상 5·18 이후 처음으로 전개된 집단적 오월 운동이었다. 이들의 제1과제는 사형수들의 죽음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 달리,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심에서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980년을 넘기기 전에 항소심 재판 결과가 나왔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81년 2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구속자 가족들에게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광주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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