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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Feb 15. 2020

5.18 관련자들, 재판에 회부되다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②

 1980년 5월 27일, 10일간의 항쟁이 막을 내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끌려갔다. 고문과 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18 민중항쟁과 관련하여 2,522명이 연행되었다. 그들은 당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현 광주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일대)에 해당하는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본래 상무대는 육군 5개 병과 교육을 진행하는 군 교육기관이나, 5.18 직후에는 관련자 수사에 총력이 집중되었다. 상무대 영창을 중심으로 군용 텐트가 펼쳐졌고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단 채 코에 물을 넣는 물고문부터 온갖 폭행과 고문들이 자행되었다. 들불야학 김영철은 극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을 시도했다. 어느 군인은 예순을 넘긴 1세대 인권변호사 홍남순을 몽둥이로 때리며 "네가 육법에 통달했느냐, 나는 육법 위에 떼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게는 자신들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할 '그림'이 필요했다. 상부에서 미리 작성해둔 시나리오 (일명 '와꾸')에 따라 광주 시민들의 항쟁은 유력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조종을 받은 내란이 되었다. 5·18 민중항쟁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근거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군부는 전남대학교 복학생 대표 정동년을 수괴로 지목했다. 그는 그해 4월 김대중에게 강연을 요청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아갔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방명록에 이름만 남기고 돌아왔다. 군부는 정동년이 나이도 많을뿐더러, 김대중과 만남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근거도 있었기에, 수괴로 제시하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5·18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수감되어 있었다.


 군 수사관들은 정동년에게 김대중으로부터 받은 돈을 누구에게 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정동년은 "김대중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아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에게 270만 원을, 전남대 복학생 윤한봉에게 170만 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정동년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상무대 영창에서 숟가락으로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동년은 1964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던 중 6·3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박석무 등과 함께 1세대 전남대 학생운동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정동년은 시위 참여로 학교에서 제적당했고, 이후 서울에서 친형이 운영하던 양복점을 10여 년간 함께 운영한 후 나주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군부는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은 물론,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여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3차례 구속되었던 윤한봉을 검거하는 데 실패했다. 두 사람은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군부는 곧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김대중과 예비검속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김대중은 이밖에도 우리 민족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대 국가적 불상사였던 광주사태의 발단도 배후 조종하였음이 밝혀졌다. 김대중은 전남대 복학생인 정동년이 김대중 가를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대학생 데모 현황을 논의한 후 500만 원의 자금을 주면서 자신의 서적과 선동 문건 등을 전남대, 조선대에 배포하고 대정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교사 선동하였다. 정동년은 김대중의 지시에 따라 광주에 내려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270만 원을 조선대 데모책 윤한봉에게 170만 원을 주어 광주사태의 발단을 이루었던 전남대 가두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 - 수사결과 중 -"


 김대중은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예비검속 된 이들이 주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중에는 유시민, 이해찬, 심재철 등 2020년 현재 상당히 주류적인 인물들도 존재한다.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내란음모 재판 당시 심재철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재판에서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이해찬을 거쳐 돈을 받았다는 등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며 울부짖었고, 다른 피고들도 포효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심 동지, 고생 많았지?" 하며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지난 2019년, 심재철 의원은 유시민과 이해찬을 언급하며 "이들도 진술서를 통해 자백했다"고 주장했고, 한동안 '진술서 공방'이 오갔다. 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황광우의 주장만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대학생을 잡아다 극도의 공포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한 전두환의 보안사, 그들의 폭력을 전제하지 않고 우리들이 겪은 지난 시절의 불행을 동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군홧발에 의한 20대 자백 진위보다, 다만 묻고 싶다. 오월 정신으로 살고 있냐고"


 1980년 10월 24일,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선고가 시작되었다. 관련 구속자 2,522명 중 61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중 212명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1심 재판부는 군검찰에 의해 기소된 404명 중 149명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했다. 255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다.


 정동년, 김종배, 박남선, 배용주, 박노정 등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홍남순, 정상용, 서규창, 윤석루, 하동렬, 윤재민, 서만석 등 7명에게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감상윤, 명노근, 김운기, 양희승 등 12명에게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로도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980년 12월 29일, 계엄고등군법회의 2심 재판부는 2심 재판에 회부된 163명 중 80명을 형 집행면제 및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나머지 83명은 유죄를 선고받았고, 1981년 3월 31일에 열린 대법원 판결에서 형량을 확정받았다. 이로서 불과 5개월 만에 5·18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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