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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Feb 21. 2020

5.18 구속자 가족들, 사형 집행을 저지하다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④

 1981년 2월 18일, 전두환이 영광원전 기공식에 참여한 후 광주를 방문했다. 범인이 사건 현장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5.18 구속자 가족들은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품 안에 숨긴 채, 결의에 찬 눈빛을 하고 금남로로 향했다. 불과 8개월 전, 5.18 당시 시민들로 가득했던 그 거리에는 전두환을 환영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된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곧 전두환이 탄 차량이 유동사거리를 지나 금남로로 진입했다.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행진하던, 그 거리였다.


 그런데, 금남로에 나와있던 5.18 구속자 가족들 앞에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전두환 환영을 위해 동원된 시민들은 모두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누구도 태극기를 흔들거나 박수를 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민들은 학살자를 환영할 수 없었다. 기습시위를 위해 YMCA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속자 가족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전두환의 차량이 도청 바로 앞에 위치한 YMCA 부근에 다가서자 구속자 가족들이 달려 나가 차량을 막아섰다. 21세기에는 목격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전두환은 의전차량의 창문을 열고 팔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정현애가 전두환의 팔을 잡고 “우리는 5.18 가족들입니다.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고 외쳤다. 구속자 가족들은 현수막을 펼치며 “사형은 안된다 구석자를 석방해야 한다”며 외치는 기습시위를 진행했다. 놀란 경호원들이 차량에서 뛰어내려 달려들었고, 구속자 가족들은 모두 끌려나갔다. 전두환은 전남도청을 들린 후 서울로 돌아갔다. 5.18 이후 전두환을 향해 최초로 직접 항의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5.18 관련자들의 대법원 선고 일자가 잡혔다. 1981년 3월 31일이었다. 사형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인혁당 사건처럼 4월 1일에 즉시 집행될 거라는 우려가 컸다. 구속자 가족들은 사형 집행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전국의 대학들에 움직여달라는 요청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리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를 찾아갔다. 윤공희 대주교, 1980년 5월 19일, 가톨릭센터 6층에 있던 집무실에서 군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목격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습대책위에 참여했다. 그는 구속자 가족들의 간절한 부탁에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답변했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2심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을 묵묵히 방청한 구속자 가족들은 그 길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명동성당 미사가 끝난 직후 5.18 구속자 가족들이 연단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들은 “우리는 광주에서 온 5.18 가족들입니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한 후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배포했다. 명동성당 점거농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시간 후 밤이 찾아왔다. 곧 경찰이 들이닥쳐 모두 잡혀갈 것만 같았다. 5.18 구속자 가족들은 서슬 퍼런 독재 시대이지만 천주교의 대표인 추기경 집무실에는 경찰도 함부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로 갔다.


 그 어떤 사전작업도 없었지만, 추기경은 즉시 문을 열고 그들 모두를 환대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집무실 점거농성 진행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단 한차례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진압을 준비하던 공안당국에게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추기경 다웠다.



 5.18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온 윤공희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전두환 면담요청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을 만나 “더 이상 광주가 피를 흘려선 안된다. 사형 집행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전두환은 “사형을 꼭 시켜야겠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한 대로 1981년 4월 1일,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전두환 군부는 5.18 관련자 사형집행으로 시민들의 저항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결국 1981년 4월 3일, 전두환은 특별사면 조치를 발표하여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을 징역 20년형으로 감형하는 등 모든 5.18 구속자들의 형량을 대폭 낮추었다.    


  이어 그해 성탄절 특사를 기점으로 5.18과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들을 전원 석방조치했다. 5.18 구속자 가족들의 저항은 결론적으로 더 이상의 죽음을 저지하고 관련자들의 조기 석방에 기여했다. 5.18 직후 가장 혹독했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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