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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Feb 25. 2020

5.18 '수괴' 지목 윤한봉, 미국으로 밀항하다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⑤

 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군부는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들은 5.18 관련자들과 김대중을 하나의 사건으로 엮어낼 생각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진압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사전에 점찍어두었던 주요 인물 검거에 실패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행방이 묘연했고,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 진영의 '총책' 윤한봉 검거에 실패했다. 그들은 미리 그려둔 조직도를 가지고 사건을 짜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검거 실패는 상당한 패착이었다. 결국 군부는 김대중 자택에 방문했으나, 김대중을 면담하지는 못했던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수괴로 내세웠다. 정동년은 5.18에 참여하기도 전에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으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군부는 시민들의 항쟁 5.18을 김대중의 조종을 받고 일어난 사건으로 조작하려 했다.


 윤한봉은 5.18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여덟 번의 검문을 받고 순천에 당도했다. 그는 그 길로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윤한봉은 훗날 5공 청문회장에서 전두환을 향해 "발포 쟁점부터 밝혀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일갈하는 이철용을 찾아갔다. 이해찬과 함께 한마당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최권행과 훗날 목사가 되는 김은경이 윤한봉이 죽지 않았다면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미리 도피처를 마련해둔 상황이었다. 윤한봉은 이듬해 4월까지 홍정경, 윤정모, 신옥재, 성염 등 소개받은 인물들의 자택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에게는 무려 5천만 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려있었다. 만에 하나 체포될 경우 조작 사건의 주연이 되어 위대한 항쟁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라 생각한 그는 언제든 자결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칼을 24시간 휴대했다.


 1980년 8월, 활동가 성찬성이 독일 대사관을 통해 정치망명을 시도하자고 제안했다. 이미 독일대사관 고위 외교관의 승낙을 받은 상황이었다. 결행일은 8월 26일, 학살자 전두환의 11대 대통령 취임식 날이었다. 윤한봉은 역시 서울을 전전하고 있던 전 들불야학 강학 박효선을 합류시켰다. 두 사람은 망명 준비에 들어갔다. 계획은 이랬다. 12시 30분,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온 독일인 남녀와 접선한다. 이들과 함께 독일대사관으로 이동한다. 독일인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는 즉시 대사관에 들어간다. 이후 독일 전역에 이 사태를 보도할 준비를 마친 독일 언론사 특파원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망명은 외교문제로 부상하고 정부 간 교섭 후 합법적 출국 방향으로 선회될 가능성이 높다.


 1980년 8월 26일, 윤한봉과 박효선은 약속된 장소에서 독일인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곧 독일대사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 건지, 접선하기로 했던 외교관과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을 느낀 두 사람은 만일을 대비하여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날 밤, 성찬성으로부터 "취임식장에서 독일대사관으로 이동하던 외교관과 기자들이 교통체증 탓에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이 전달되었다. 다음날 다시 독일대사관으로 가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박효선이 "조국에서 버티겠다"라고 마음을 바꿔, 두 사람의 독일 망명은 무산되었다.


 1980년 겨울, 어느 검찰 수사관이 5.18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던 윤한봉의 둘째형 윤광장을 한쪽으로 불러냈다. 그는 "지금 구속된 사람들은 절대 사형 안 당한다. 그러나 윤한봉이는 잡히면 죽는다. 완전히 죽여버릴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내용을 일러주었다. 윤한봉은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70년대에만 3차례 옥고를 치렀고, 대부분의 사회운동 조직들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군부는 광주지역 운동권의 남은 역량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남대 총학생회 기획부장 송선태가 작성한 '자유 노트'가 군부에 발각되었다. 해당 문건은 윤한봉의 주장을 전해 들은 송선태가 군부독재와 시민들이 광주에서 충돌할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놓고 구상해둔 문건이었다.  물론 해당 문건은 개인적으로 노트에 적어둔 정도의 내용이었으며, 송선태 등의 전남대 총학생회 관련자들은 5.18에 참여하지 못한 , 예비검속을 피해 몸을 숨겼다. 해당 문건 관련 사건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생존한 광주지역 활동가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1981년, 1년간 도피생활을 지속한 윤한봉은 '미국 밀항'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후배 정용화와 매제 박형선이 밀항선을 수소문했다.


 1981년 4월 29일, 정용화가 윤한봉의 도피처인 석달언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배가 준비되었다고 전달했다. 윤한봉은 급히 마산으로 내려갔다. 윤한봉은 2등 기관사 정찬대, 3등 항해사 최동현을 소개받았다. 정찬대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광주 활동가 정찬용의 동생이었고, 최동현은 역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매제 박형선의 후배였다.


 1981년 4월 29일, 윤한봉은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올라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가 숨어있던 장소는 철제 상자에 가까운 곳으로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열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35일간 밀항을 도와준 선원 두 사람이 제공한 8차례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잣 3알, 멸치 1개, 마른 새우 1개로 버텨온 나날들이었다.  


 1981년 6월 3일, 윤한봉이 타고 있던 밀항선이 펌데일 부두에 당도했다. 그는 태연하게 배에서 내려 시애틀 중심가로 이동했다.


 한편, 윤한봉이 화물선에 숨어있을 때, 밀항을 지원했던 후배 활동가 정용화는 강신석 목사와 YMCA 조아라 장로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두 사람은 광주에 와있던 선교사 헌트리 목사를 통해 미국에 편지를 전달했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던 김용성과 이학인이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에 있던 북미한국인권위원회에 연락했다. 해당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페리스 하비 목사는 급히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 부부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연락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윤한봉을 보호하기 위해 즉시 이민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이민국 직원 3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장한 상태로 밀항선에 승선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시애틀에 당도한 후 한동안 김동건, 김진숙 부부의 집에 머물렀다. 6월 12일, 이민국이 출석을 요청하여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이민국은 곧 노동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러나 해당 허가서에는 '입국 경위 : 밀항'이라고 적혀있었다. 1980년,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을 위해 망명법이 제정되었다. 윤한봉 역시 해당 법률에 부합하였고, 미국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법률상 특 A급으로 재판이 열리면 즉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민국은 차일피일 재판을 미루더니, 6년 후인 1987년에야 재판을 열어 윤한봉을 망명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지 않았을 뿐, 망명재판 계류 중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의 미국 체류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윤한봉은 망명생활에 있어, 세 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절대 내 것을 갖지 않는다. 그는 곧 L.A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커뮤니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윤한봉은 그동안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었다. 5.18의 진상을 미주사회에 널리 알리고, 모금을 통해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냈다. 1988년 6월 해체 시까지 매년 3만 달러를 광주로 송금했으니, 실로 대단한 저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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