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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Feb 29. 2020

살아남은 사람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다.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⑥

 1980년 5월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월은 그대로 끝날 수 없는 일이었다. 5월 27일 아침,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방송이 나왔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완전히 소탕되었습니다. 폭도들은 생포 207명 사망 2명입니다. 이상은 전남북 계엄분소에서 전해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금일부로 정상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도청을 점령한 계엄군이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망월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청소차량'을 사용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망월동에 5.18 희생자 공동 묘역이 조성되었다. 많은 시민들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느꼈다.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던 윤상원의 죽음을 접한 그의 동지들도 슬픔과 미안함을 느꼈다. 광주에도 1970년대부터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던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바로 '들불야학' 소속 활동가들이었다.


 그해 오월을 전후로 노동야학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하던 일곱 명의 활동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은 1975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이후 전남대 학생운동가 김상윤, 윤강옥 등과 함께 사회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서울에 위치한 주택은행에 취업하여 은행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회의감을 느껴 퇴사한 후 광주로 돌아왔다. 들불야학에서 교사에 해당하는 강학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던 박기순이 그를 찾아왔고, 윤상원은 들불야학 일반사회 강학이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두운 현실과 싸울 것입니다”라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던 그였다. 그는 5.18 당시 10일간 앞장서서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들불야학 구성원들과 함께 진실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했고, 시민들의 궐기대회 실무도 도맡아 진행했다. 5월 26일에는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는 "우리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외신 기자회견을 마쳤다. 윤상원은 다음날인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이 발포한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박기순은 1978년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3학년이었다. 그해 6월 박정희 정권의 군사교육을 비판하며 전남대 교수 11인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박기순은 이를 지지하는 활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1978년 7월, 박기순은 들불야학 결성했다. 그는 들불야학에 강학과 학강을 두고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거점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했다. '강학''학강'은 각각 '가르치며 배운다', '배우면서 가르친다' 뜻이다. 이는 운동가와 피억압자가 함께할 때, 르침과 배움을 주도받아야 한다는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남미에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학을 제시한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처럼 박기순은 광주 지역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활동한 노동운동가였다.


 그러나 1978년 12월 26일 새벽, 박기순은 갑작스러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날까지도 들불야학 학강들과 함께 장작을 찾기 위해 뒷산에 올랐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 앞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윤상원은 그의 일기에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어난다”라고 적었다. 당시 박기순의 장례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황석영 작가가 조사를 낭독했다. 우연히 광주에 와있던 가수 김민기는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두 사람이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1981년 5월, 살아남은 사람들이 윤상원과 박기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날 이후 광주 지역 활동가들이 황석영의 집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두 사람의 넋을 기리는 '넋풀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남대생 김종률이 곡을 썼고 가사는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일부를 차용해서 작성했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들은 먼저 간 임들을 기리는 노래를 작곡하고 두 사람의 혼을 기리는 영혼결혼식을 시작했다.


 1982년 2월 20일, 5.18 당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는 망월묘역에서 윤상원과 박기순을 기리는 영혼결혼식을 진행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의 넋을 기리는 '넋풀이'와 관련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 녹음했다.


그날 이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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