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규 Feb 29. 2020

5.18의 진실, 세계에 알려지다.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⑦

 5.18의 진실을 가장 먼저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은 어느 독일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위르겐 힌츠페터. 1980년 당시 독일 제1 공영방송 소속 도쿄 특파원이었다. 그는 5월 19일 라디오에서 우연히 광주에 대한 짧은 보도를 듣고 묘한 낌세를 느끼고 광주로 향했다. 한국에 입국한 후 서울에서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호텔 택시기사 김사복의 도움을 받았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도착했고 이틀간의 상황을 생생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5월 21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로 전달하기 위해, 힌츠페터는 신라호텔에서 판매하는 쿠키를 구매한 후 쿠키 통에 필름을 담아 검문을 피한 후 도쿄로 돌아왔다. 필름은 즉시 도쿄 지국을 통해 독일 본사로 보내졌다.     


 1980년 5월 22일. 독일 공영방송의 8시 뉴스인 타게스샤우는 광주에서 군인이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전 세계가 광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미국 오전 뉴스가 일제히 광주의 소식을 보도했다. 미국 전역으로 진실이 전해졌다. 외신기자들이 광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던 독일과 미국의 한국 교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광주에 대한 기사와 보도들을 모으고 집회와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의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 조사천의 영정사진을 안고 있는 조천호의 사진이 AP통신 테리 앤더슨 기자에 의해 촬영되었다. 이 사진은 독일로 보내져 독일의 유명잡지 슈피겔지의 1면에 실려 광주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뉴욕타임스 1면에도 5.18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었다. 전 세계 언론은 ‘군부의 학살’에 주목했다.



 5.18 이후 독일과 미국에 있던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광주에 대한 사진과 영상을 모아 한국으로 밀반입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5.18 관련 내용을 '오 광주여'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편집하여 한국으로 역수출하기도 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청년들은 독일에서 반입한 사진들을 이용해 오월 사진집을 만들었다. 5.18의 사진과 영상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광주의 진실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회에 온존 하던 많은 것들이 광주의 사진과 영상이 확산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1980년 5월 이후 광주는 세계의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사진과 영상을 독일로 보냈고, 독일 공영방송 9시 뉴스에 보도된 광주의 생생한 진실은 다음 날 오전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분노한 교민들과 미국인들은 광주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독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5.18 직후 일본 도쿄에서는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광주에서의 학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광주의 소식을 접한 일본의 인권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는 눈물을 흘리며 광주를 그렸다.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다. 1980년, 광주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지만, 지난 40년은 세계가 광주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다.


-- 이전 글 -- 다음 글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