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진실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세상은 변화해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대학생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독재에 항거했다. 엄혹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내 서클을 중심으로 광주의 진실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사회 각계인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18일 야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영삼은 5.18 3주기를 맞아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손을 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를 하고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의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이나 부산, 평택이나 강릉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이십 대를 보낸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우연한 존재로 바꿔버렸다. 그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스스로 학습을 시작하고 조직을 만들었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1986년에는 5.3 인천항쟁이 일어났다. 거리로 나온 인천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5.18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당시 경찰은 이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하였으며 연행된 시민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다. 심지어는 이 과정에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경찰은 이에 대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5.18 7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 2천여 명의 신도가 참석했고 5.18 당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미사가 진행되었다. 1부 미사가 끝나고 김승훈 신부가 제단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준비해 온 원고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제목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며 참석자들도 함께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냈다. 3,100자 분량의 폭로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전두환 군부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나 5.18 때 죽을까 봐 무서워서 숨어있었다”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던 청년이 쓰러지자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한열은 1987년 7월 5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1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그의 시신은 5.18 영령들이 묻혀있는 망월묘역에 묻혔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외쳤던 민주주의는 결국 7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태로 1차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광주 이후 광주를 알리고 광주의 이름으로 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월, 그날은 결코 반복되어선 안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