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⑨
1980년 5월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는 수많은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날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6월 항쟁 직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야권의 양대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의 독자출마로 인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광주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 다음번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1994년, ‘5.18 진상규명 광주항쟁 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294명의 연서로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의 5.18 학살자들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를 1년 넘게 진행하지 않았다. 1995년이면 5.18 사건 공소시효가 끝나기 때문에 간절한 상황이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5.18 관련 고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시민을 학살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한, 검찰의 답변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5.18 당사자들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광주는 다시 한번 첨예한 전선이 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주목했다.
'5.18'을 둘러싼 국회에서의 논의 역시 심상치 않았다. 5.18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공방이 진행되었다. 1995년 11월 24일, 헌법재판소의 결론을 사전에 파악한 김영삼 대통령은 5.17 쿠데타 관련자 처리를 위한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집권여당이던 민주자유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발표했다.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5.18 관련 내란 세력에 대한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고 밝혔다. 5.18 관련 사건을 불기소로 처분한 검찰은 당혹하였고 11월 30일부로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를 재개했다.
전두환은 “5, 6공 등 과거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은 좌파 운동권의 주장과 같다며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현충원을 참배한 후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현충원은 그가 반란 과정에서 살해한 국군 장교 및 초병들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1995년 12월 3일, 검찰은 이러한 전두환의 행위를 도주로 간주하고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발부받은 구속영장을 들고 가 전두환을 그의 고향에서 체포했다.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에 관련된 이들 역시 하나 둘 구속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받는 혐의는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주요임무 종사,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 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주요임무 종사, 내란목적 살인 등으로 헌정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들이었다.
1980년을 기준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수사국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장관,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세동 30경비단장, 박준병 20사단장,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박종규 3공수 15대대장 등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모두 반란과 살인, 학살의 주범들이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에 5.18 특별법이 위헌이라는 제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앞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을 위한 헌정사적 이정표를 마련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매우 중대한 반면, 이 사건 반란 행위자들의 군사반란 및 내란죄의 공소시효 완성으로 인한 법적 지위에 대한 신뢰이익이 보호받을 가치가 별로 크지 않다”며 5.18 특별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