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6일,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기소한 검찰은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에게 '무기징역형'을 구형했다. 유학성, 최세창 등 8인에게는 '징역 15년형'이 구형되었다. 장세동에게는 '징역 12년'이 구형되었으며, 박준병 등 3인에게는 '징역 10년형'이 구형되었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1심 판결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노태우에게는 유기징역 중 최고 형량인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함께 구속된 범죄자들에게도 중형이 선고되었다.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학살한 이들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이번 사건 재판은 단순한 보복적 차원을 넘어, 정의를 실현한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많은 시민들은 다시는 광주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들을 비롯한 과거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전두환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했다. 다른 피고인들도 더 낮은 형량을 판결받았다. 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 권성 재판장은 전두환의 감형에 대한 근거로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로부터 탈피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그는 “군사반란과 학살 등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죄가 크지만,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은 늦게나마 국민의 뜻에 순종한 것”이라며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감일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한 단계 형량을 낮추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전두환에게 선고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유였다. 학살의 죄를 저지른 반인륜 범죄자에게 대한민국 법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관대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전두환 등에 대한 사면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명분은 ‘국민대화합’이었다. 사면에 대해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다수인 47.9%의 시민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곧 대법원이 관련자들에 대한 형벌을 확정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상의한 후 1997년 12월 22일부로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에 가담한 25명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구속 750일 만에 사면된 전두환은 기자들 앞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오랫동안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언급한 후 "당면한 경제위기를 맞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로써 5.18 관련 재판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그날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 중 일부는 2020년 현재에도 멀쩡히 살아남아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1980년 5월로부터 17년, 윤상원이 말한 것처럼,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패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42년이 지난 2022년, 우리는 여전히 광주의 질문 앞에서 고민한다.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더 나은 세상', 그날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