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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Feb 29. 2020

5.18 민주화운동, 그날 이후

①~⑩편

 1980년 5월 27일, 5·18 민주화운동이 10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5·18은 결코 그대로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80년 5월 30일, 한 청년이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6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이름은 김의기, 서강대 무역학과 4학년이었다. 그는 경상북도 영주 출신으로, 대학 입학 후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각종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농활에 10회 이상 참여하고 반유신 시위를 준비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가였다.


 1980년 5월, 그는 5월 19일에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함평 고구마 사건 2주년 기념식 참석차 광주에 왔다. 그러나 비상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특수부대 군인들이 광주를 들이닥쳤다.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김의기는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의해 쓰러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전율했다. 훗날 동화작가가 되는 윤기현이 서울로 돌아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설득했다. 김의기는 해방광주 기간에 서울로 돌아왔다.


 1980년 5월 30일, 김의기는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인쇄했다. 예정되어 있던 금요기도회가 취소된 상황이었고, 두 대의 탱크가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곧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김의기는 인쇄한 유인물을 뿌리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탱크 사이로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 잔당들의 왜곡과 거짓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 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 6월 9일에는 이화여대 앞에서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시민 학생들을 위로하며’라는 글을 남기고 분신으로써 독재에 항거했다. 외적 저항과 내적 저항이 모두 봉쇄된 상황에서, 자기 파괴를 선택해가며 광주를 외쳤던 이들이 있었다. 그날 이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아픔에 함께했다. 누군가는 광주의 이름으로 싸웠고, 누군가는 스스로 광주가 되었다. 김의기와 김종태 두 사람은 모두 5·18 묘역에 묻혔다.


그날 이후, 대세를 직감한 언론들은 반란 군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5·18 직후 발표된 사설에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1980년 8월 23일 조선일보의 ‘인간 전두환’ 기사는 언론 정신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1980년 8월 6일, 롯데호텔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두환 사령관이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해 달라”라고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해 오월 광주에 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10일간의 항쟁 기간 동안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음을 생각할 때, 너무나 부끄러운 행위였다. 1993년, 이선교 목사 등 일부 기독교인들이 '전두환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한경직 목사 등 23명을 반란 방조 혐의로 고발했다. 물론 실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행위는 분명 인간의 양심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믿어왔다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었다.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직후 체육관 선거를 실시하여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투표율과 득표율 모두 99%였다.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는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7년 단임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1981년 2월 11일, 전두환은 다시 한번 체육관 선거를 실시하여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헌정사상 유일하게, 단 한 번도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인물이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시민들을 학살하여 권력을 손에 쥔 '학살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1980년 5월 27일, 10일간의 항쟁이 막을 내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끌려갔다. 고문과 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18 민중항쟁과 관련하여 2,522명이 연행되었다. 그들은 당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현 광주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일대)에 해당하는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본래 상무대는 육군 5개 병과 교육을 진행하는 군 교육기관이나, 5·18 직후에는 관련자 수사에 총력이 집중되었다. 상무대 영창을 중심으로 군용 텐트가 펼쳐졌고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단 채 코에 물을 넣는 물고문부터 온갖 폭행과 고문들이 자행되었다. 들불야학 김영철은 극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을 시도했다. 어느 군인은 예순을 넘긴 1세대 인권변호사 홍남순을 몽둥이로 때리며 "네가 육법에 통달했느냐, 나는 육법 위에 떼법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게는 자신들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할 '그림'이 필요했다. 상부에서 미리 작성해둔 시나리오 (일명 '와꾸')에 따라 광주 시민들의 항쟁은 유력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조종을 받은 내란이 되었다. 5·18 민중항쟁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근거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군부는 전남대학교 복학생 대표 정동년을 수괴로 지목했다. 그는 그해 4월 김대중에게 강연을 요청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아갔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방명록에 이름만 남기고 돌아왔다. 군부는 정동년이 나이도 많을뿐더러, 김대중과 만남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근거도 있었기에, 수괴로 제시하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5·18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수감되어 있었다.


 군 수사관들은 정동년에게 김대중으로부터 받은 돈을 누구에게 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정동년은 "김대중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아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에게 270만 원을, 전남대 복학생 윤한봉에게 170만 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정동년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상무대 영창에서 숟가락으로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동년은 1964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던 중 6·3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박석무 등과 함께 1세대 전남대 학생운동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정동년은 시위 참여로 학교에서 제적당했고, 이후 서울에서 친형이 운영하던 양복점을 10여 년간 함께 운영한 후 나주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군부는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은 물론,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여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3차례 구속되었던 윤한봉을 검거하는 데 실패했다. 두 사람은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군부는 곧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김대중과 예비검속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김대중은 이밖에도 우리 민족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대 국가적 불상사였던 광주사태의 발단도 배후 조종하였음이 밝혀졌다. 김대중은 전남대 복학생인 정동년이 김대중 가를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대학생 데모 현황을 논의한 후 500만 원의 자금을 주면서 자신의 서적과 선동 문건 등을 전남대, 조선대에 배포하고 대정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교사 선동하였다. 정동년은 김대중의 지시에 따라 광주에 내려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270만 원을 조선대 데모책 윤한봉에게 170만 원을 주어 광주사태의 발단을 이루었던 전남대 가두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 - 수사결과 중 -"


 김대중은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예비검속 된 이들이 주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중에는 유시민, 이해찬, 심재철 등 2020년 현재 상당히 주류적인 인물들도 존재한다.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내란음모 재판 당시 심재철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재판에서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으로부터 이해찬을 거쳐 돈을 받았다는 등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며 울부짖었고, 다른 피고들도 포효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심 동지, 고생 많았지?" 하며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지난 2019년, 심재철 의원은 유시민과 이해찬을 언급하며 "이들도 진술서를 통해 자백했다"고 주장했고, 한동안 '진술서 공방'이 오갔다. 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황광우의 주장만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대학생을 잡아다 극도의 공포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한 전두환의 보안사, 그들의 폭력을 전제하지 않고 우리들이 겪은 지난 시절의 불행을 동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군홧발에 의한 20대 자백 진위보다, 다만 묻고 싶다. 오월 정신으로 살고 있냐고"


 1980년 10월 24일,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선고가 시작되었다. 관련 구속자 2,522명 중 61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중 212명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1심 재판부는 군검찰에 의해 기소된 404명 중 149명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했다. 255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다.


 정동년, 김종배, 박남선, 배용주, 박노정 등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홍남순, 정상용, 서규창, 윤석루, 하동렬, 윤재민, 서만석 등 7명에게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감상윤, 명노근, 김운기, 양희승 등 12명에게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로도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980년 12월 29일, 계엄고등군법회의 2심 재판부는 2심 재판에 회부된 163명 중 80명을 형 집행면제 및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나머지 83명은 유죄를 선고받았고, 1981년 3월 31일에 열린 대법원 판결에서 형량을 확정받았다. 이로서 불과 5개월 만에 5·18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에도 각지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며칠 후, 고려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학내에 유인물을 배포했고,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서 억압에 항거했다. 그러나 집단적인 저항을 진행할 수 없는, 칠흑과 같이 어두운 시점이었다. 한국사회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신군부는 차근차근 국가권력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18 직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당연히 5·18 당사자들이었다. 5월 29일, 5·18 사망자 유가족들이 126구의 시신을 망월동 묘역에 안장한 후 위령제를 거행했다. 이틀 뒤, '5·18 광주의거 유족회' (초대회장 박찬봉) 결성되었다.


 유족들은 긴 싸움이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항쟁에 연루되어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광주에는 본보기로 수십 명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5·18 직전까지 녹두서점을 통해 사회과학 서적을 보급해왔던 김상윤의 아내이자 중학교 역사교사 정현애는 5월 17일 예비검속으로 남편이 구속된 직후, 5·18에 뛰어들었다. 그는 직접 검은색 천을 구해 전남도청에 조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정현애는 5월 27일 도청진압 직후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상무대 영창에 끌려오니 남편이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수사관들이 정현애에 대한 동정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던 정현애의 남편 김상윤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수사관들은 부부 중 사람은 빼줘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현애는 곧 광산경찰서로 이감되었다. 군부는 5·18에 연루된 여성들을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분리 수감했다.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던 박영순, 5·18 기간 내내 차량에서 방송을 해왔던 전옥주와 차명숙, 그리고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에게 체포된 여성들이 그곳에 있었다. 정현애는 9월 5일 자로 풀려났다.


 정현애가 석방되던 시점에는 이미 5·18 구속자 가족 간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홍남순 변호사와 명노근 전남대 교수의 아내였던 윤이정, 안성례 여사가 모임을 주도했다. 안성례 여사는 5·18 기간 내내 기독병원 간호감독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호소를 듣고 병원을 찾아와 헌혈을 했던 고등학생 박금희가 헌혈 직후 총에 맞아 다시금 병원으로 실려오는 광경을 눈물을 흘리며 목격하기도 했다. 이들 모임에 정현애가 합류했고 구속된 시민들의 가족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항쟁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끌려간 이들은 주로 남성이었기 때문에, 구속자 가족모임은 주로 여성들이 주도했다. 윤이정, 안성례, 정현애 세 사람이 대표와 총무 등의 직책을 나누었고, 본격적으로 5·18 구속자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모든 저항이 봉쇄되었던 서슬 퍼런 전두환 집권 초기, 이들의 활동은 사실상 5·18 이후 처음으로 전개된 집단적 오월 운동이었다. 이들의 제1과제는 사형수들의 죽음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 달리,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심에서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980년을 넘기기 전에 항소심 재판 결과가 나왔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81년 2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구속자 가족들에게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광주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81년 2월 18일, 전두환이 영광원전 기공식에 참여한 후 광주를 방문했다. 범인이 사건 현장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5·18 구속자 가족들은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품 안에 숨긴 채, 결의에 찬 눈빛을 하고 금남로로 향했다. 불과 8개월 전, 5·18 당시 시민들로 가득했던 그 거리에는 전두환을 환영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된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곧 전두환이 탄 차량이 유동사거리를 지나 금남로로 진입했다.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행진하던, 그 거리였다.


 그런데, 금남로에 나와있던 5·18 구속자 가족들 앞에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전두환 환영을 위해 동원된 시민들은 모두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누구도 태극기를 흔들거나 박수를 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메서 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민들은 학살자를 환영할 수 없었다. 기습시위를 위해 YMCA 앞에 대기하고 있던 구속자 가족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전두환의 차량이 도청 바로 앞에 위치한 YMCA 부근에 다가서자 구속자 가족들이 달려 나가 차량을 막아섰다. 21세기에는 목격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전두환은 의전차량의 창문을 열고 팔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정현애가 전두환의 팔을 잡고 “우리는 5·18 가족들입니다.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고 외쳤다. 구속자 가족들은 현수막을 펼치며 “사형은 안된다 구석자를 석방해야 한다”며 외치는 기습시위를 진행했다. 놀란 경호원들이 차량에서 뛰어내려 달려들었고, 구속자 가족들은 모두 끌려나갔다. 전두환은 전남도청을 들린 후 서울로 돌아갔다. 5·18 이후 전두환을 향해 최초로 직접 항의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5·18 관련자들의 대법원 선고 일자가 잡혔다. 1981년 3월 31일이었다. 사형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인혁당 사건처럼 4월 1일에 즉시 집행될 거라는 우려가 컸다. 구속자 가족들은 사형 집행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전국의 대학들에 움직여달라는 요청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리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를 찾아갔다. 윤공희 대주교, 1980년 5월 19일, 가톨릭센터 7층에 있던 집무실에서 군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목격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습대책위에 참여했다. 그는 구속자 가족들의 간절한 부탁에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답변했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2심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을 묵묵히 방청한 구속자 가족들은 그 길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후, 명동성당 미사가 끝난 직후 5·18 구속자 가족들이 연단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들은 “우리는 광주에서 온 5·18 가족들입니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한 후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배포했다. 명동성당 점거농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시간 후 밤이 찾아왔다. 곧 경찰이 들이닥쳐 모두 잡혀갈 것만 같았다. 5·18 구속자 가족들은 서슬 퍼런 독재 시대이지만 천주교의 대표인 추기경 집무실에는 경찰도 함부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로 갔다.


 그 어떤 사전작업도 없었지만, 추기경은 즉시 문을 열고 그들 모두를 환대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집무실 점거농성 진행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단 한차례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진압을 준비하던 공안당국에게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추기경 다웠다.



 5·18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온 윤공희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전두환 면담요청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을 만나 “더 이상 광주가 피를 흘려선 안된다. 사형 집행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전두환은 “사형을 꼭 시켜야겠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한 대로 1981년 4월 1일,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전두환 군부는 5·18 관련자 사형집행으로 시민들의 저항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결국 1981년 4월 3일, 전두환은 특별사면 조치를 발표하여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을 징역 20년형으로 감형하는 등 모든 5·18 구속자들의 형량을 대폭 낮추었다.    


 이어 그해 성탄절 특사를 기점으로 5·18과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들을 전원 석방조치했다. 5·18 구속자 가족들의 저항은 결론적으로 더 이상의 죽음을 저지하고 관련자들의 조기 석방에 기여했다. 5·18 직후 가장 혹독했던 시절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항쟁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군부는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들은 5·18 관련자들과 김대중을 하나의 사건으로 엮어낼 생각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진압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사전에 점찍어두었던 주요 인물 검거에 실패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행방이 묘연했고,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 진영의 '총책' 윤한봉 검거에 실패했다. 그들은 미리 그려둔 조직도를 가지고 사건을 짜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검거 실패는 상당한 패착이었다. 결국 군부는 김대중 자택에 방문했으나, 김대중을 면담하지는 못했던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수괴로 내세웠다. 정동년은 5·18에 참여하기도 전에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으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군부는 시민들의 항쟁 5·18을 김대중의 조종을 받고 일어난 사건으로 조작하려 했다.


 윤한봉은 5·18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여덟 번의 검문을 받고 순천에 당도했다. 그는 그 길로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윤한봉은 훗날 5공 청문회장에서 전두환을 향해 "발포 쟁점부터 밝혀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일갈하는 이철용을 찾아갔다. 이해찬과 함께 한마당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최권행과 훗날 목사가 되는 김은경이 윤한봉이 죽지 않았다면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미리 도피처를 마련해둔 상황이었다. 윤한봉은 이듬해 4월까지 홍정경, 윤정모, 신옥재, 성염 등 소개받은 인물들의 자택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에게는 무려 5천만 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려있었다. 만에 하나 체포될 경우 조작 사건의 주연이 되어 위대한 항쟁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라 생각한 그는 언제든 자결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칼을 24시간 휴대했다.


 1980년 8월, 활동가 성찬성이 독일 대사관을 통해 정치망명을 시도하자고 제안했다. 이미 독일대사관 고위 외교관의 승낙을 받은 상황이었다. 결행일은 8월 26일, 학살자 전두환의 11대 대통령 취임식 날이었다. 윤한봉은 역시 서울을 전전하고 있던 전 들불야학 강학 박효선을 합류시켰다. 두 사람은 망명 준비에 들어갔다. 계획은 이랬다. 12시 30분,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온 독일인 남녀와 접선한다. 이들과 함께 독일대사관으로 이동한다. 독일인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는 즉시 대사관에 들어간다. 이후 독일 전역에 이 사태를 보도할 준비를 마친 독일 언론사 특파원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망명은 외교문제로 부상하고 정부 간 교섭 후 합법적 출국 방향으로 선회될 가능성이 높다.


 1980년 8월 26일, 윤한봉과 박효선은 약속된 장소에서 독일인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곧 독일대사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 건지, 접선하기로 했던 외교관과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당혹감을 느낀 두 사람은 만일을 대비하여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날 밤, 성찬성으로부터 "취임식장에서 독일대사관으로 이동하던 외교관과 기자들이 교통체증 탓에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이 전달되었다. 다음날 다시 독일대사관으로 가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박효선이 "조국에서 버티겠다"고 마음을 바꿔, 두 사람의 독일 망명은 무산되었다.


 1980년 겨울, 어느 검찰 수사관이 5·18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던 윤한봉의 둘째형 윤광장을 한쪽으로 불러냈다. 그는 "지금 구속된 사람들은 절대 사형 안 당한다. 그러나 윤한봉이는 잡히면 죽는다. 완전히 죽여버릴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내용을 일러주었다. 윤한봉은 197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70년대에만 3차례 옥고를 치렀고, 대부분의 사회운동 조직들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군부는 광주지역 운동권의 남은 역량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남대 총학생회 기획부장 송선태가 작성한 '자유 노트'가 군부에 발각되었다. 해당 문건은 윤한봉의 주장을 전해 들은 송선태가 군부독재와 시민들이 광주에서 충돌할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놓고 구상해둔 문건이었다.  물론 해당 문건은 개인적으로 노트에 적어둔 정도의 내용이었으며, 송선태 등의 전남대 총학생회 관련자들은 5·18에 참여하지 못한 , 예비검속을 피해 몸을 숨겼다. 해당 문건 관련 사건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생존한 광주지역 활동가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1981년, 1년간 도피생활을 지속한 윤한봉은 '미국 밀항'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후배 정용화와 매제 박형선이 밀항선을 수소문했다.


 1981년 4월 29일, 정용화가 윤한봉의 도피처인 석달언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배가 준비되었다고 전달했다. 윤한봉은 급히 마산으로 내려갔다. 윤한봉은 2등 기관사 정찬대, 3등 항해사 최동현을 소개받았다. 정찬대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광주 활동가 정찬용의 동생이었고, 최동현은 역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매제 박형선의 후배였다.


 1981년 4월 29일, 윤한봉은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올라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가 숨어있던 장소는 철제 상자에 가까운 곳으로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열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35일간 밀항을 도와준 선원 두 사람이 제공한 8차례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잣 3알, 멸치 1개, 마른 새우 1개로 버텨온 나날들이었다.  


 1981년 6월 3일, 윤한봉이 타고 있던 밀항선이 펌데일 부두에 당도했다. 그는 태연하게 배에서 내려 시애틀 중심가로 이동했다.


 한편, 윤한봉이 화물선에 숨어있을 때, 밀항을 지원했던 후배 활동가 정용화는 강신석 목사와 YMCA 조아라 장로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두 사람은 광주에 와있던 선교사 헌트리 목사를 통해 미국에 편지를 전달했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던 김용성과 이학인이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에 있던 북미한국인권위원회에 연락했다. 해당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페리스 하비 목사는 급히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 부부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연락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윤한봉을 보호하기 위해 즉시 이민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이민국 직원 3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장한 상태로 밀항선에 승선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시애틀에 당도한 후 한동안 김동건, 김진숙 부부의 집에 머물렀다. 6월 12일, 이민국이 출석을 요청하여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이민국은 곧 노동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러나 해당 허가서에는 '입국 경위 : 밀항'이라고 적혀있었다. 1980년,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을 위해 망명법이 제정되었다. 윤한봉 역시 해당 법률에 부합하였고, 미국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법률상 특 A급으로 재판이 열리면 즉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민국은 차일피일 재판을 미루더니, 6년 후인 1987년에야 재판을 열어 윤한봉을 망명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지 않았을 뿐, 망명재판 계류 중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의 미국 체류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윤한봉은 망명생활에 있어, 세 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절대 내 것을 갖지 않는다. 그는 곧 L.A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커뮤니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윤한봉은 그동안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었다. 5·18의 진상을 미주사회에 널리 알리고, 모금을 통해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냈다. 1988년 6월 해체 시까지 매년 3만 달러를 광주로 송금했으니, 실로 대단한 저력이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월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5월 27일 아침, 라디오에 끊임없이 방송이 나왔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폭도들은 완전히 소탕되었습니다. 폭도들은 생포 207명 사망 2명입니다. 이상은 전남북 계엄분소에서 전해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정상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도청을 점령한 계엄군이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망월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청소차량'을 사용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망월동에 5·18 희생자 공동 묘역이 조성되었다. 많은 시민들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느꼈다.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던 윤상원의 죽음을 접한 그의 동지들도 슬픔과 미안함을 느꼈다. 광주에도 1970년대부터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던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바로 '들불야학' 소속 활동가들이었다.


 그해 오월을 전후로 노동야학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하던 일곱 명의 활동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은 1975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이후 전남대 학생운동가 김상윤, 윤강옥 등과 함께 사회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서울에 위치한 주택은행에 취업하여 은행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회의감을 느껴 퇴사한 후 광주로 돌아왔다. 들불야학에서 교사에 해당하는 강학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던 박기순이 그를 찾아왔고, 윤상원은 들불야학 일반사회 강학이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두운 현실과 싸울 것입니다”라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던 그였다. 그는 5·18 당시 10일간 앞장서서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들불야학 구성원들과 함께 진실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했고, 시민들의 궐기대회 실무도 도맡아 진행했다. 5월 26일에는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는 "우리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외신 기자회견을 마쳤다. 윤상원은 다음날인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이 발포한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박기순은 1978년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3학년이었다. 그해 6월 박정희 정권의 군사교육을 비판하며 전남대 교수 11인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였고, 박기순은 이를 지지하는 활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1978년 7월, 박기순은 들불야학 결성했다. 그는 들불야학에 강학과 학강을 두고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거점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했다. 강학과 학강은 각각 가르치며 배운다,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운동가가 피억압자와 함께할 때 단순히 이들을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르침과 배움을 주도받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남미에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학을 제시한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처럼 박기순은 광주 지역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활동한 노동운동가였다.


 그러나 1978년 12월 26일 새벽, 박기순은 갑작스러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날까지도 들불야학 학강들과 함께 장작을 찾기 위해 뒷산에 올랐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 앞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윤상원은 그의 일기에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서 피어난다”라고 적었다. 당시 박기순의 장례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었다. 황석영 작가가 조사를 낭독했다. 우연히 광주에 와있던 가수 김민기는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두 사람이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1981년 5월, 살아남은 사람들이 윤상원과 박기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날 이후 광주 지역 활동가들이 황석영의 집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두 사람을 넋을 기리는 '넋풀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남대생 김종률이 곡을 썼고 가사는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일부를 차용해서 작성했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들은 먼저 간 임들을 기리는 노래를 작곡하고 두 사람의 혼을 기리는 영혼결혼식을 시작했다.


 1982년 2월 20일, 5·18 당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는 망월묘역에서 윤상원과 박기순을 기리는 영혼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그날 이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5·18의 진실을 가장 먼저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은 어느 독일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위르겐 힌츠페터. 1980년 당시 독일 제1 공영방송 소속 도쿄 특파원이었다. 그는 5월 19일 라디오에서 우연히 광주에 대한 짧은 보도를 듣고 묘한 낌세를 느끼고 광주로 향했다. 한국에 입국한 후 서울에서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호텔 택시기사 김사복의 도움을 받았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도착했고 이틀간의 상황을 생생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5월 21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로 전달하기 위해, 힌츠페터는 신라호텔에서 판매하는 쿠키를 구매한 후 쿠키 통에 필름을 담아 검문을 피한 후 도쿄로 돌아왔다. 필름은 즉시 도쿄 지국을 통해 독일 본사로 보내졌다.     


 1980년 5월 22일. 독일 공영방송의 8시 뉴스인 타게스샤우는 광주에서 군인이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전 세계가 광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미국 오전 뉴스가 일제히 광주의 소식을 보도했다. 미국 전역으로 진실이 전해졌다. 외신기자들이 광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던 독일과 미국의 한국 교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광주에 대한 기사와 보도들을 모으고 집회와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의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 조사천의 영정사진을 안고 있는 조천호의 사진이 외신기자에 의해 촬영되었다. 이 사진은 독일로 보내져 독일의 유명잡지 슈피겔지의 1면에 실려 광주를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뉴욕타임스 1면에도 5·18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었다. 전 세계 언론은 ‘군부의 학살’에 주목했다.



 5·18 이후 독일과 미국에 있던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광주에 대한 사진과 영상을 모아 한국으로 밀반입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5·18 관련 내용을 '오 광주여'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편집하여 한국으로 역수출하기도 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청년들은 독일에서 반입한 사진들을 이용해 오월 사진집을 만들었다. 5·18의 사진과 영상들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광주의 진실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회에 온존 하던 많은 것들이 광주의 사진과 영상이 확산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1980년 5월 이후 광주는 세계의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사진과 영상을 독일로 보냈고, 독일 공영방송 9시 뉴스에 보도된 광주의 생생한 진실은 다음 날 오전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분노한 교민들과 미국인들은 광주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독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5·18 직후 일본 도쿄에서는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광주에서의 학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광주의 소식을 접한 일본의 인권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는 눈물을 흘리며 광주를 그렸다.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다. 1980년, 광주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지만, 지난 40년은 세계가 광주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다.


 5·18의 진실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세상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대학생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들도 서서히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엄혹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내 서클을 중심으로 광주의 진실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사회 각계의 인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18일 야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영삼은 5·18 3주기를 맞아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손을 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를 하고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의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이나 부산, 평택이나 강릉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항쟁은 1980년대 이십 대를 보낸 사람들을 거의 대부분 우연한 존재로 바꿔버렸다. 그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스스로 학습을 시작하고 조직을 만들었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이를 바탕으로 1986년에는 5.3 인천항쟁이 일어났다. 거리로 나온 인천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5·18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당시 경찰은 이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하였으며 연행된 시민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다. 심지어는 이 과정에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경찰은 이에 대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5·18 7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 2천여 명의 신도가 참석했고 5·18 당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미사가 진행되었다. 1부 미사가 끝나고 김승훈 신부가 제단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준비해 온 원고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제목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떨렸으며 참석자들도 함께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냈다. 3,100자 분량의 폭로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전두환 군부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나 5·18 때 죽을까 봐 무서워서 숨어있었다”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던 청년이 쓰러지자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6월 항쟁’으로 군부독재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한열은 1987년 7월 5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1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그의 시신은 5·18 영령들이 묻혀있는 망월묘역에 묻혔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외쳤던 민주주의는 결국 7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태로 1차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광주 이후 광주를 알리고 광주의 이름으로 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월, 그날은 결코 반복되어선 안되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그날 이후 '오월'은 이 사회의 가장 첨예한 전선이었다.


 1980년 5월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는 수많은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날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6월 항쟁 직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야권의 양대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의 독자출마로 인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광주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 다음번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1994년, ‘5·18 진상규명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294명의 연서로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의 5·18 학살자들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를 1년 넘게 진행하지 않았다. 1995년이면 5·18 사건 공소시효가 끝나기 때문에 간절한 상황이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5·18 관련 고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시민을 학살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한, 검찰의 답변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5·18 당사자들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광주는 다시 한번 첨예한 전선이 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주목했다.


 '5·18'을 둘러싼 국회에서의 논의 역시 심상치 않았다. 5·18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공방이 진행되었다. 1995년 11월 24일, 헌법재판소의 결론을 사전에 파악한 김영삼 대통령은 5.17 쿠데타 관련자 처리를 위한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집권여당이던 민주자유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발표했다.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5·18 관련 내란 세력에 대한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고 밝혔다. 5·18 관련 사건을 불기소로 처분한 검찰은 당혹하였고 11월 30일부로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를 재개했다.      


 전두환은 “5, 6공 등 과거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은 좌파 운동권의 주장과 같다며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현충원을 참배한 후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현충원은 그가 반란 과정에서 살해한 국군 장교 및 초병들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1995년 12월 3일, 검찰은 이러한 전두환의 행위를 도주로 간주하고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발부받은 구속영장을 들고 가 전두환을 그의 고향에서 체포했다.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에 관련된 이들 역시 하나 둘 구속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받는 혐의는 반란수괴, 반란모의 참여, 반란주요임무 종사,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 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 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주요임무 종사, 내란목적 살인 등으로 헌정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들이었다.

      

 1980년을 기준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수사국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장관,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세동 30경비단장, 박준병 20사단장,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박종규 3공수 15대대장 등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모두 반란과 살인, 학살의 주범들이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에 5·18 특별법이 위헌이라는 제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앞으로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을 위한 헌정사적 이정표를 마련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매우 중대한 반면, 이 사건 반란 행위자들의 군사반란 및 내란죄의 공소시효 완성으로 인한 법적 지위에 대한 신뢰이익이 보호받을 가치가 별로 크지 않다”며 5·18 특별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기각했다.


 1996년 8월 6일, 이들을 법원에 기소한 검찰은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유학성, 최세창 등 8인에게는 징역 15년이 구형되었다. 장세동에게는 징역 12년이 구형되었으며 박준병 등 3인에게는 징역 10년이 구형되었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은 1심 판결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노태우에게는 유기징역 중 최고 형량인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함께 구속된 범죄자들에게도 중형이 선고되었다.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학살한 이들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이번 사건 재판은 단순히 보복적 차원을 넘어 정의를 실현한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많은 시민들은 다시는 광주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들을 비롯한 과거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전두환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다른 피고인들도 더 낮은 형량을 판결받았다. 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 권성 재판장은 이에 대한 근거로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로부터 탈피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이어 그는 “군사반란과 학살 등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죄가 크지만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은 늦게나마 국민의 뜻에 순종한 것”이라며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감일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한 단계 형량을 낮추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전두환에게 선고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유였다. 학살의 죄를 저지른 반인륜 범죄자에게 대한민국 법원은 너무나 관대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전두환 등에 대한 사면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명분은 ‘국민대화합’이었다. 사면에 대해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다수인 47.9%의 시민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곧 대법원 판결이 관련자들에 대한 형벌을 확정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상의한 후 1997년 12월 22일부로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에 가담한 25명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구속 750일 만에 사면된 전두환은 기자들 앞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오랫동안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언급한 후 "당면한 경제위기를 맞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로써 5·18 관련 재판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그날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 중 일부는 2020년 현재에도 멀쩡히 살아남아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1980년 5월로부터 17년, 윤상원이 말한 것처럼,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패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42년이 지난 2022년, 우리는 여전히 광주의 질문 앞에서 고민한다.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더 나은 세상', 그날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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