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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r 07. 2020

[문학들 59호] 미래세대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

특집. 5.18 너머의 5.18

  우연한 기회로, 계간 '문학들' 2020년 봄호에 기고를 했습니다. 주제는 '미래세대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중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봤던 문학지에 기고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 글을 담아준 '문학들' 집필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0. 이 시대의 투사회보를 배포하고자 한다


  1980년 5월 그날, 아버지는 시민군 버스에 올라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돌을 옮겼다. 그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집회 현장에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았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시작된 붉은 선혈은 발목까지 흘러내렸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사경을 헤맸다. 그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1996년 10월, 내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역사를 처음 인지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5·18 당시 사진들을 보게 된 날의 기억이다. 사진을 본 장소는 아마 망월동 묘역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망월묘역에는 그날의 사진들이 여과 없이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곤봉으로 시민을 때리고 있는 장면, 대검을 장착한 군인이 시민을 쫓아가는 장면, 군인이 M16 소총을 시민 쪽으로 겨누고 있는 장면. 그리고 우리들의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모습으로 살해당한 시신들의 모습. 그날, 내 마음은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된 것처럼 깊은 상흔을 입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 광주는 아픔이었고 소외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슴 한편에 묻어둔 채 고등학생이 되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내가, 광주의 붉은 빛깔을 다시금 돌아본 건 2014년이었다. 그해 나는 광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을 끝내 은폐하려는 모욕과 비방의 칼날이 광주를 겨누고 있었다.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아들이 누워 있는 관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홍어 택배’로 희화화되었다. 나는 깊이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2014년 5월 9일, 나는 페이스북에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 주세요.’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만들었고,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당 페이지를 통해 광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뿌리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유인물의 이름은 <투사회보>, 박용준, 윤상원, 전용호, 나명관 등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모두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들이었다. 프린터가 없던 당대에는 등사기를 통해 유인물을 인쇄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는 장소에서 원지를 긁은 줄판을 밀어야 했고, 100여 장을 복사하고 나면 새롭게 글을 적어야 했다. 500장을 인쇄하려면 같은 내용의 원고 5부가 필요한 셈이다. 들불야학 강학 박용준은 10일 동안 유인물에 글씨를 썼다. 5월 27일, YWCA에 남은 박용준은 군인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죽었다.


  그해 가을, 5·18에 참여하지 못한 대학생들이 서울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렸다. 광주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하나의 숭고한 의무가 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2020년 현재, 우리는 이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페이스북, 유튜브를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 나는 앞으로도 이 시대의 투사회보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방식으로 배포하고자 한다.


1. 5·18 정신, 그 지평을 넓혀야 한다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막연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오월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6년의 시간이 오월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오월은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아픈 일이었지만, 그 도시에서 열흘간 있었던 일이 진정으로 소중하고 위대한 이유는 아픔에 있지 않았다. 그날, 광주에는 아픔을 넘어서는 긍지와 주체성이 있었다. 1980년 5월 26일, 윤상원 열 사는 외신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자회견을 마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 신뢰했다. 이들의 정신이 5·18을 보편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5·18 정신은 민주주의 쟁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날,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대로 5·18 정신은 그 지평을 넓혀 가야 한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지난 2018년 10월 25일에 열린 어느 축제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날, 제1회 광주퀴어문화축제가 5·18 민주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는 드디어 민주와 인권의 성지에서 성소수자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낯설게 들릴 수 있지 만, 우리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 시민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함께 세상을 살아갔지만,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광주가 원했던 더 나은 세상에 어떤 시민들의 목소리는 포함될 수 없다면, 그것은 대동세상일 수 없다.

 

  제1회 그리고 제2회 광주퀴어문화축제를 목격하며, 이것이 광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나는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5·18 계승 뱃지’라는 이름의 굿즈를 제작해 제1회 광주퀴어문화축제 때 나누었다. 모두 200개를 나눌 수 있었다. 이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 주세요 : 오월뱃지’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열어, 5·18을 상징하는 뱃지와 5·18의 정신이 그 지평을 확대해야 함을 상징하는 ‘5·18 계승뱃지’를 나누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때 프로젝트 소개의 말미에 “윤상원 열사가 이야기한 내일, 제가 싸우는 방식이 바로 이 프로젝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제 5·18 그 지평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 이것은 분명 미래세대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2. 5·18, 전국에 자리 잡아야 한다


  1980년 5·18 민중항쟁은 10일간 지속된 처절한 항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10일 만에 끝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난 40년 동안 광주는 지난한 기억 투쟁의 역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이름으로 싸웠다. 그날의 사진을 배포하여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부터,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이어졌다. 2020년에 이르러 지난 40년간의 시간을 조망하면, 우선 그 진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5·18 전국화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3가지 고민이 있다.

 

  첫째, 기념행사 진행 문제다. 언제부터인가 5·18 기념행사가 국가 주도 추모행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과거 5·18 기념행사는 시민들이 직접 준비하여 실행하는 신명 나는 행사였지만 예산을 받게 된 이후로는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난 2년간 5·18 기념행사위원회 모니터링단으로 참여하여 5·18 행사들을 평가했다.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가 전무했고, 과거의 틀에 갇혀, 광주에서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5·18 ‘전야제’는 남성 발언자 11명의 이야기를 들은 후 노래를 듣고, 작년과 같은 공연을 보자, 마무리되었다. 5·18 관련 행사들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시 미래세대가 짊어질 과제일 것이다.

 

  둘째, 5·18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기념행사와 별개로 5·18을 알리기 위한 노력은 다각도로 지속되어야 한 다. 최근 유튜브를 중심으로 5·18을 왜곡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나고 있다. 지난해 말, 5·18 기념재단과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이 함께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수십여 개의 극우 성향 유튜브 채널에서 5·18을 왜곡하는 영상들이 버젓이 공개되어 있었다. 특히 이 같은 영상들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로, 5·18 왜곡 영상 200개 중 49%가 2019년에 업로드되었다. 이 중 17개의 영상은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5·18 관련 글을 한 번에 조회할 수 있는 ‘구글링’을 시도해 보면, 왜곡 세력이 축적해 둔 글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현재, 5·18 당시 사진을 포함하여 진실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온라인 거점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셋째,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4·3 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님을 뵌 적이 있다. 4·3 행사위원회는 2018년, 4·3 사건 70주년을 맞이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한다. 70만 개의 동백꽃 뱃지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했고,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해당 뱃지를 착용하고 기념사를 낭독할 수 있도록 힘썼다. 이제 우리들은 4·3 사건을 생각할 때면, 뇌리에 각인된 동백꽃의 붉은빛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의외로 5·18을 상징하는 공식적인 뱃지와 같은 굿즈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재단 차원에서 5·18 뱃지를 전국에 배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3. 5·18 정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시내에 위치한 노동청 앞에서 한 청년이 붉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가두방송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영순, 5·18 직전까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았다.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날, 광주는 외로운 섬이었다. 도청에 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영영 끝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적막이 내려앉은 새벽 3시, 박영순은 도청 방송실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 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


  방송이 끝난 직후 M16 소총을 앞세운 3공수여단이 도청으로 진입했다. 10일간의 항쟁은 막은 내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이들이 있었기에, 광주의 외침에 응답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날 이후 세계가 광주의 부름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핏빛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홍콩의 소식은 또 다른 광주였다. 보고 듣고 배워 온 오월의 광주가 그곳에 있었다. 홍콩의 소식을 접할 때면, 마치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도청에 남은 사람들의 외침을 듣는 것 같았다. 홍콩 시민들이 압제에 맞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는데, 그곳에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14일, 5·18 민주광장에 홍콩시위 지지를 표명하는 현수막을 게시했다. 해당 사실을 SNS를 통해 알리자, 전남대학교에 ‘레논 벽’을 설치하겠다며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어느새 여섯 명의 시민이 모여 함께 레논 벽을 설치했다.

 

  지금 홍콩 시민들은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한 상황이다. 이 중 ‘송환법 공식철회’를 제외한 4가지는 광주 시민들이 계엄사에 요구했던 조건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지난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민주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홍콩의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경찰은 다시금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했고 지하철역에 진입했다. 대표와 의회 구성원의 절반을 시민의 손으로 선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민주주의는 없다.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이후 광주는 세계의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사진과 영상을 독일로 보냈다. 독일 공영방송 9시 뉴스에 보도된 광주의 생생한 진실은 다음날 오전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분노한 교민들과 미국인들은 광주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독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5·18 직후 일본 도쿄에서는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광주에서의 학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광주의 소식을 접한 일본의 인권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는 눈물을 흘리며 광주를 그렸다.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다. 1980년, 광주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다. 그러나 지난 40년은 세계가 광주의 고통에 응답한 역사였다.

 

  지금 홍콩이 광주를 부르고 있다. 홍콩시위의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던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이 “홍콩은 1980년 광주와 같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드디어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따뜻한 연대를 조금이나마 돌려줄 기회가 왔다. 2020년 봄, 나는 광주의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홍콩을 방문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오월 광주에 방문해 달라고 제안할 생각이다. 2020년, 홍콩시위 연대는 5·18 세계화의 출발점이다. 나는 과감한 제안을 던지고 싶다. 5·18 민중항쟁 40주년 올해 우리들의 슬로건은 ‘오월에서 세계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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