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 윤한봉 (尹漢琫) 선생
(1948년 2월 1일 ~ 2007년 6월 27일)
1. 1970년대, 광주 지역 사회운동 진영의 '총책'
윤한봉은 1948년 2월 1일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입대하여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주둔 12사단에서 병역을 마쳤다. 복무 중 김신조 일당의 1.21 사태로 군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되어 총 3년 6개월 동안 복무했다. 윤한봉은 이후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축산과에 입학했다. 때는 1971년이었다. 그는 입학 후 한동안 학업에 열중했고, 곧 학내에서 유명한 모범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한봉은 광주일고 출신들이 전남대학교에 설립한 이념서클 '민족사회연구소'가 주도한 '학원 병영화 반대' 시위를 우연히 목격했다. 이들은 윤한봉과 같은 71학번으로 광주일고 이념서클 '광랑' 출신들이었다. 해당 시위를 주도한 정상용, 이양현 등은 시위 직후 강제 징집되었다. 윤한봉은 이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석1) 1년 뒤 윤한봉은 1972년 10월 유신이 발표된 직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유신쿠데타를 접한 직후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다.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 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을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 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 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 된 거지"
그는 특유의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장악해나갔다. 특히 신뢰하던 지인 민상홍을 설득하여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한 후 승리를 일구어내기도 했다. 윤한봉은 이를 바탕으로 민족사회연구소의 후신 교양독서회와 농과대학 학생회를 통해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주석2)이 발생했다. 윤한봉은 자신을 찾아온 나병식의 설득으로 전국 동시 다발 시위를 준비하던 민청학련에 합류했다. 나병식은 광주일고 출신으로 첫 집단적 반유신 시위였던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 주동자였다. 나병식은 훗날 풀빛출판사를 설립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윤한봉은 민청학련 호남권 총책을 맡았으며 전남대학교 활동가 김정길, 이강, 김상윤 등과 함께 반유신 시위를 준비했다. 민청학련은 반유신 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의조직으로, 강령을 비롯한 조직의 틀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청학련은 전국 동시 다발 시위를 일으키기도 전에 중앙정보부에 발각되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하며, "민청학련이 공산 불법단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의 조종을 받아,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대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동시에 시위를 일으키는 정도로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박정희는 관련자들에게 "4월 8일까지 자수할 것"을 요구했다. 긴급조치 4호 발표로 조직이 노출되자, 윤한봉은 광주 지역 활동가들을 집결시킨 후 "박정희가 권고한 자수기간이 지나는 4월 9일 자로 시위를 감행하자"고 주장했다. 4월 9일, 그들은 전남대학교에서 반유신 시위를 주동했고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활동가 18명이 체포되었으며,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은 모두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형 집행정지가 결정되었다. (주석3) 2월 17일, 윤한봉은 이해찬, 류갑종 등과 함께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윤한봉은 그 즉시 '민주회복 전남구속자협의회' 결성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역 사회 인사들을 합류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윤한봉은 사회적 자원을 동원함에 있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6년 4월, 전남대학교 기독교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김영종이 4.19 혁명 16주년을 맞아 전남대학교에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윤한봉은 해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20개월간 수형생활을 했다. 두 번째 구속이었다. (주석4)
윤한봉은 두 번째 출소 직후 발생한 1978년 함평 고구마 사건(주석5) 당시 농민들과 농민운동가들을 지원했다. 그는 농민들이 북동성당에서 단식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즉시 문병란 시인의 집에서 솜이불과 생필품들을 공수하여 단식자들에게 전달했다. 이어 단식 중인 농민들을 지지하는 집회를 기획했다. 그 결과 광주 YWCA를 출발하여 단식이 진행되던 북동성당까지 행진하는 연대집회를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대규모 시위는 유신 시기에는 그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윤한봉은 이후 현대문화연구소를 창립하여 광주 지역의 모든 사회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1979년 10월 17일, 전남대학교 활동가 고희숙과 박유순이 전남대 상담지도관실을 방화했다. (주석6) 상담지도관실은 중앙정보부와 정보과 형사들이 대학을 감시하던 학내 거점이었다. 1979년 10월 23일, 윤한봉은 해당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었고, 물고문을 당했다. 며칠간 고문이 지속되었는데 5일째 되는 날 아침, 형사들이 수갑을 풀어주며 "나라 걱정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제?"라고 이야기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곧 방송에서 "유고, 계엄령"이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두 달 뒤, 윤한봉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주석7)
윤한봉은 1970년대에만 3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마찬가지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각각 선고받았는데, 세 건의 사건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2. 5.18과 미국 망명
윤한봉은 광주에서 군부독재와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음을 사전에 예견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5.18의 구체적인 전개를 예상한 것은 아니고, 광주에서 군부독재와 시민들의 충돌이 일어나 많은 시민들이 희생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5월 21일로 예정되어 있던 '임시국회 개원'을 들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각 정당들이 5월 21일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계엄령을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목적살인 등 창군 이래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신군부가 가만히 정국의 주도권을 국회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 주도권을 상실할 경우 자신들의 신변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윤한봉은 신군부가 움직일 것을 간파했다. 1980년 당시는 유신 시기에 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구·경북 지역 운동 세력이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으며, '부마항쟁'으로 부산 경남 지역 운동세력마저 회복이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윤한봉은 그렇기 때문에 학생운동을 비롯한 각 부문의 운동 역량이 고조되어 있던 광주에서 군부와 시민의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그 시점을 임시국회 개원 이후인 5월 21일에서 25일 사이로 예상했다.
그는 5월 5일에 있었던 민주가족 야유회에서 정상용을 비롯한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예상을 설명했지만, 이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던 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박용준, 정상용은 모두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았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중책을 맡았다. 윤상원과 박용준은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윤한봉이 예상한 시점과 달리 신군부는 5월 21일이 아닌 5월 17일 자정을 기점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되어 있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주요 인사들을 예비검속 명목으로 체포했다. 김상윤, 정동년을 비롯한 광주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윤한봉은 문병란 시인의 집에 방문한 덕에 예비검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의 매제이자 전남대학교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형선, 녹두서점의 김상윤 등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예비검속을 피했지만, 이승용 부총학생회장 등 4명의 간부가 체포되었고, 조선대 총학생회에 해당하는 민주투쟁위원회 양희승, 유재도, 김운기 등도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한봉은 광주 내외를 오가며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윤한봉은 이로 인해 5.18에 참여하지 못했고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서울로 올라가 한동안 당시에는 소설가였던 이철용의 집에 머물렀다.
1980년 10월, 5.18로 인해 재판에 회부된 이들 중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군부는 김대중의 자택에 방문하여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정동년을 수괴로 내세웠다. 1970년대에만 세 차례 수감생활을 한 윤한봉을 검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여전히 도피 중이었던 윤한봉은 1970년대 광주 지역 운동권 총책으로 체포될 경우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을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받고 여러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1981년 4월 29일 자로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오른다. 그는 40일간의 항해 끝에 미국에 도착했으며, 한미관계를 고려한 레이건 행정부의 뒤늦은 일처리로 1987년에야 미 국무부로부터 정치망명을 허가받고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가 된다. (주석8)
3. 망명 생활
1981년 6월 3일, 윤한봉이 타고 있던 밀항선이 펌데일 부두에 당도했다. 그는 즉시 배에서 내려 시애틀 중심가로 이동했다. 35일간 밀항을 도와준 선원 두 사람이 제공한 8차례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잣 3알, 멸치 1개, 마른 새우 1개로 버텨온 나날들이었다. 게다가 그가 숨어있던 장소는 철제 상자에 가까운 곳으로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열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한편, 윤한봉이 화물선에 숨어있을 때, 밀항을 지원했던 정용화가 강신석 목사와 YMCA 조아라 장로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두 사람은 광주에 와있던 선교사 헌트리 목사를 통해 미국에 편지를 전달했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던 김용성과 이학인이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에 있던 북미한국인권위원회에 연락했다. 해당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페리스 하비 목사는 급히 시애틀의 김동건, 김진숙 부부와 에디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에게 연락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윤한봉을 보호하기 위해 즉시 이민국에 연락했고, 이민국 직원 3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장한 상태로 밀항선에 승선하기도 했다.
윤한봉은 시애틀에 당도한 후 한동안 김동건, 김진숙 부부의 집에 머물렀다. 6월 12일, 이민국이 출석을 요청하여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이민국은 곧 노동허가서를 발급해주었다. 해당 허가서에는 '입국 경위 : 밀항'이라고 적혀있었다. 1980년, 베트남 전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을 위해 망명법이 제정되었다. 윤한봉 역시 해당 법률에 부합하였고, 미국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법률상 특 A급으로 재판이 열리면 즉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민국은 차일피일 재판을 미루더니, 6년 후인 1987년에야 재판을 열어 윤한봉을 망명자로 인정했다. 그는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였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지 않았을 뿐, 망명재판 계류 중이었기 때문에 윤한봉의 미국 체류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윤한봉은 망명생활에 있어, 세 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절대 내 것을 갖지 않는다. 그는 곧 L.A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커뮤니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82년 6월, 윤한봉은 그동안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었다. 그는 5.18의 진상을 미주사회에 널리 알리고, 모금을 통해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냈다. 1988년 6월 해체 시까지 매년 3만 달러를 광주로 송금했으니, 실로 대단한 저력이었다.
1982년 6월, 경찰이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군산 제일고 국어교사 이광웅을 비롯한 교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그들은 이광웅을 고문하던 중 그가 도피 중이던 윤한봉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미 5.18 관련자들의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이후였으나, 경찰들은 총책 '윤한봉'에 대한 수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곧 정용화, 최권행, 김은경, 홍희담, 윤경자 등을 비롯한 20여 명이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여동생 윤경자가 "오빠는 미국에 망명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보좌관이 광주에 와서 신분을 확인해갔다는 사실까지 확인하자, 경찰들은 아연 질색했다.
깜짝 놀란 노태우 내무부장관이 청와대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관련자들은 "윤한봉이 미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한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격노한 한 경찰 고위 관계자는 "대한민국 경찰 최대의 실수!"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광웅을 비롯한 교사들을 '군산 제일고 교사 고정간첩단'으로 조작했다. 1982년 12월, 경찰은 "이광웅 등 9명이 윤한봉으로부터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교사받아 이적단체 '오송회'를 결성, 암약 중에 일망타진되었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것이 일명 '오송회 사건'의 전말이다.
1980년 겨울, 윤한봉은 이광웅의 매제인 신옥재의 집에 3개월간 숨어있었다. 윤한봉은 겨울방학을 맞아 누이동생 부부를 찾아온 이광웅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광웅은 광주학살의 충격으로 전두환 일당에 대한 강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윤한봉은 "선생님께서는 분노만 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본격적인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교사들과 학생들의 의식화, 조직화가 필요합니다"라고 이광웅을 설득한 후 전주의 문정현 신부를 소개해주었다. 얼마 후 이광웅은 몇 사람의 교사, 친지들과 함께 그를 다시 찾아왔고, 윤한봉은 민주화운동에 관한 일반론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광웅은 옥고를 치른 후 전교조 활동에 헌신했고, 199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3년 2월 윤한봉은 해외운동 10년 계획을 수립한 후 그 거점이 될 청년공동체 설립을 기획했다. 그는 곧 '민족학교'를 만들고 미주 지역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끌어모아 한국의 민주화운동 지원을 시도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있던 김상돈 전 서울특별시장이 윤한봉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민족학교는 창립 직후부터 현재까지 연방정부가 인정한 영구 비과세 단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자산총액은 3,892,962$로 한화로 약 45억 원이며, 홈페이지를 통해 재정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1983년 5월, 윤한봉은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밀입국 배경과 정치망명 신청 사실을 소상히 공개했다. 이미 공안당국이 윤한봉의 망명을 파악한 이후였다. 윤한봉은 5.18 민주화운동 3주년 강연도 열었다. 그는 초창기에는 김일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이 시점에는 김상원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켰던 윤상원을 잊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윤한봉은 1982년 10월, 박관현 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단식투쟁 중 옥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우 봉사회' 사무실에서 10여 일간 항의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1984년 1월 1일, 윤한봉은 재미 한국청년연합 설립을 통해 미국 전역에 해외동포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했다. 한청련은 미국의 한인 풀뿌리 커뮤니티 기반 조직 설립의 모태로, 이를 기반으로 각 지역에 마당집 설립 활동을 전개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민족교육봉사원, 필라델피아 청년마당집, 토론토 민족교육문화원, 호주 시드니 민족교육문화원 등의 마당집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도 한청련 지부가 설립되어 해외동포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민족학교, 청년학교, 민족교육봉사원을 중심으로 탈춤 강습을 하고 민중가요 테이프 '조국의 노래'를 보급했다. 특히 자금 마련에 있어 판화 보급이 주요했다. 윤한봉은 조국에서 판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판화를 대량으로 공수했다. 이어 판화를 액자에 끼워 그럴싸하게 만들어 100달러에서 300달러 사이에 판매했다. 홍성담 화백이 5.18을 주제로 그린 판화의 도안도 공수받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판매 수익은 고스란히 조직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윤한봉은 1986년 워싱턴 D.C에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했으며 1987년에는 재미한겨례동포연합을 설립했다. 1988년에는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준비위원회 결성했고 전두환․노태우 방미 규탄 시위를 진행했다.
1988년 윤한봉은 '국제평화대행진단'을 조직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거리를 도보로 행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 임수경의 평양 방문 및 판문점을 통한 도보 귀환을 기획, 배후 지원했다.
2020년 현재까지도 그가 조직한 단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해외동포 운동의 한 축을 구성하여 한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1993년 수배해제 직후 귀국하기까지 12년간 해당 활동을 통해 한인사회를 주도했다.
윤한봉은 1992년 L.A 폭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민족학교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물을 여러 통에 나누어 담아두고 민족학교를 지켰다고 한다. 다행히 민족학교는 공격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한인사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가담자들은 한인 가게를 포위하고 들어 둔 보험이 있는지 물어본 후 없다고 대답하면, 거액을 요구했다.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가게를 방화하였다. 윤한봉은 이들의 당당한 약탈과 방화를 보고 새삼 5.18의 위대함과 항쟁 참여자들, 그중에서도 가난한 시민들의 고결한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4. 귀국 후 활동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5.18 관련자 수배 해제가 발표되었다. 당시까지 수배가 지속되던 5.18 관련자는 윤한봉 혼자였다. 언론들은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귀국이 가능해졌음을 대서특필했다. 5월 19일, 윤한봉이 전격 귀국했다. 5.18 주간인 만큼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윤한봉은 1995년 완전히 귀국한 이후 다시금 광주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유의 동원능력과 조직능력을 총동원하여 5.18 기념재단 창립을 주도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지역 사회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 이해관계를 돌파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5.18 기념재단 창립선언문' (주석9)은 현재까지도 천하명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나 정작 윤한봉 본인은 재단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윤한봉은 광주에 돌아온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지들을 만났다. 어느 날 윤한봉은 그와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김남주 시인의 집에 찾아갔다. 김남주는 윤한봉이 누구인지 묻는 자신의 부인에게 "윤한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백 프로 순결한 사람, 추호의 거짓이나 허황됨이 없는 철저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은 1994년 2월, 췌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남주의 부고를 접한 윤한봉은 '김남주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을 진행했다. 곧 김남주 시비를 그곳에 세울 수 있었다.
이어 윤한봉은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야학 열사들을 기념하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들불야학(주석10)은 1978년, 박기순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윤상원, 박용준, 김영철, 박효선, 신영일, 박관현 등이 교사에 해당하는 강학으로 활동했다.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노동야학이었다. 이중 박기순과 윤상원이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다. 이들 7명의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5.18을 전후로 세상을 떠났는데, 윤한봉은 그들 일곱 명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기념사업회 설립을 구상했다.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로 세상을 떠난 들불7열사는 다음과 같다.
<들불7열사>
박기순 (1954 ~ 1978.12.26)은 들불야학을 설립을 주도한 후 1978년 12월 26일 불의의 연탄가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 (1950.08.19 ~ 1980.05.27)은 들불야학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쳤고, 5.18 당시 학생수습대책위 대변인을 맡아 활동했으며, 계엄군이 발포한 M-16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박용준 (1956.07.09 ~ 1980.05.27)은 고아 출신으로 고아원에 해당하는 영신원에서 성장하였으며, YWCA에서 간사로 일하던 중 YWCA 신협에서 간사를 맡고 있던 김영철과 의형제의 연을 맺고 그의 집에서 함께 기거했다. 1980년 5월 27일 박용준은 YWCA를 지키던 중 계엄군이 발포한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김영철 (1948 ~ 1998.08.16)은 박용준과 함께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기거하던 중 광천동 천주교회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고 특별강학이 되었으며 윤상원과 함께 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상무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심각한 정신병을 앓게 되어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영일 (1958.10.08 ~ 1988.05.09)은 박기순과 함께 들불야학 초창기 멤버였고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에 관여했으며 1981년 5.18 진상규명을 요구한 전남대학교 9.29 사건으로 체포되어 박관현과 함께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박관현과 함께 감옥에서 40여 일간 단식투쟁을 진행했으며 출소 이후에도 사회운동을 지속하던 중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박관현 (1953.06 ~ 1982.10.12)은 전남대학교 법대생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 들불야학 활동가들이 기획한 광주공단 노동자실태조사팀에 합류했다. 실태조사 이후 윤상원의 제안으로 들불야학 강학이 되었으며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재건을 주도하여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 군부의 예비검속을 피해 여수로 몸을 피했으며 그 사이에 5.18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박관현은 도피생활 끝에 체포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 투쟁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효선 (1954.10 ~ 1998.09.10)은 들불야학 문화강학으로 활동했으며, 5.18 당시 학생수습대책위 홍보부장을 맡아 활동했으나 도청에 남지 못했다. 그는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4명이 있었다. 두 명은 죽었고 (윤상원, 박용준), 한 명은 미쳤고 (김영철), 한 명은 도망쳤다 (박효선)"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는 5.18 이후 금희의 오월 등 5.18과 관련된 연극 연출 등의 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과로로 쓰러진 후 간암 판정을 받고 운명했다.
윤한봉은 곧 이들 일곱 명의 들불야학 활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직책을 잘 맡지 않던 그였지만, 기념사업을 주도하기 위해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광주 서구 치평동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에 들불7열사 기념비를 설치했다. 이어 그들의 이름으로 수상하는 들불상을 제정했다. 들불상은 매년 1회 수상하며, 해당 연도에 부합하는 열사의 상징에 맞추어 수상자를 선정한다. 7년 주기로 돌아가는 셈이다. 윤한봉은 들불상을 제대로 된 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금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매년 1천만 원의 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했다. 들불상 각 열사들의 상징은 다음과 같다.
박기순 - 모범적인 여성 운동가
윤상원 - 모범적인 남성 운동가
박용준 - 모범적인 소년소녀 가장
박관현 - 모범적인 인권 운동가
신영일 - 모범적인 소수자 인권운동가
김영철 - 모범적인 빈민운동가
박효선 - 모범적인 문화운동가
2018년,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사업회 이사였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추천으로 서지현 검사를 들불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2019년에는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들불상은 들불야학 일곱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 및 5.18의 역사성 등을 고려할 때, 향후 대한민국 사회운동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상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높다. 윤한봉이 주도한 기념비 건립과 들불상 제정은 기념사업적 측면에서 상당히 대단한 성취였다.
이후 윤한봉은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여 지역에서의 활동을 재개했다. 그즈음 윤한봉은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한 강력한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진보정당 건설에 앞장섰다. 그는 1992년 민중당의 실패 이후 결성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정추)와 함께 진보정당 추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하자 직접 광주시지부 초대 후원회장을 맡았다. 윤한봉은 평생에 걸쳐 수십억 원에 달하는 돈을 모아 여러 단체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가 발굴한 활동가들과 그 후예들이 지금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윤한봉은 본인의 삶에 있어서는 평생 무소유로 일관했다.
2003년, 윤한봉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국민모임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70년대 반유신 활동가답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권영길 대표의 요청으로 민주노동당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당내 정파 갈등으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는 초기에 당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군자산의 약속 이후 집단 입당한 NL계열 활동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큰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여성위원장 선거와 지역위원회 부위원장 선거에 나선 진정추 계열 활동가들이 찬반투표에서 반대표 몰표를 받고 낙선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특정세력의 독선적인 운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윤한봉은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결국 그는 민주노동당 고문직을 내려놓았다.
2007년,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육교를 올라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1981년, 망명을 떠나며 레오파드호에 숨어있던 시절에 쉴 새 없이 피웠던 담배가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는 결국 폐기종 악화로 폐이식 수술을 받기로 했다. 2007년 6월 29일, 윤한봉은 폐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다시 눈뜨지 못하고 영면했다.
민족의 지도자, 민중의 벗 합수 윤한봉 선생 장례 (비디오)
윤한봉 선생은 생전에 '합수(合水)'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합수는 어감과는 달리 '똥과 오줌이 섞인 거름'을 뜻한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고 역사의 거름이 되는 길을 택했다. 역사에는 언제나 씨앗을 뿌리는 사람과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있다.
"순결하여 하얀 별과 같고 따뜻하여 봄 햇살과도 같아 우리는 그를 삶의 나침반이자 소외된 이들의 벗이라 일컬었으나 그는 다만 자신을 합수(合水)라 불리기를 바랐다"
<윤한봉 약력>
1948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71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입학
1974 민청학련 호남권 총책으로 지목, 징역 15년 선고, 전남대학교 제적
1976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징역 1년 6개월 선고
1979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 집행유예형 선고
1980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전국 지명수배
1981 미국으로 밀항 탈출, 정치망명 신청
1982 광주수난자돕기회 설립
1983 민족학교 설립
1984 재미 한국청년연합 설립
1987 정치망명 허가,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
1987 한겨레운동재미동포연합 설립
1989 임수경 평양 방문 기획, 배후 지원
1993 수배해제 직후 귀국
1994 5.18 기념재단 설립 주도
1995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소장으로 활동
2000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후원회장
2003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국민회의 공동대표
2004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 초대 이사장 역임
2005 민주노동당 고문
2007 폐이식 수술 후유증으로 영면
2007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2017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2호관 205호에 합수 윤한봉 기념강의실 조성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1. 윤한봉에 관한 책
운동화와 똥가방 (윤한봉 회고록) - 민족학교 활동가들이 인터넷 공간에 아카이빙 한 윤한봉 회고록이다.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책 출판 시점이 1996년이라 책을 소유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접근성이 떨어져 아쉬움이 있었다. 해당 작업으로 쉽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망명 - (한마당)
합수 윤한봉 선생 추모문집 - (문규현)
임을 위한 행진 - (황광우)
윤한봉 평전 - (안재성)
2.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habsoo.org/
#이 글은 나무위키 (윤한봉) 문서에도 아카이빙 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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