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속에 우리 아이 이야기가 터를 잡는다
문득 어릴 적 주인집 할머니가 떠올랐다.
혼자인 몸으로 아들 하나 키우며 자수성가하신
아주 작고 마른 몸에 허리는 꼬부라진 안경 쓴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동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다.
내 머릿속에 한양대 주변과 무학 예식장 근처를 지나간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왜 나를 데리고 다니셨는지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나는 그렇게 세상을 탐색하는 방법을
부모가 아닌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나는 부모님과 어디를 간 기억도
동네를 거닌 기억조차도 없다.
하지만 할머니와 거닌 기억은 너무도 선명하다.
잊고 있었는데 그림책 덕에
나의 이야기의 조연을 찾은 셈이다.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거니는 걸 좋아한다.
할머니 덕이라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들었다.
생활 반경 내에서 딱 그 세계만을 경험하는 부모님을 통해서 나는 크고 다양한 세상을 보고 배우지 못했다.
내가 부모님과 접한 세계는 행당동, 그 어느 골목 우리 가게가 있던 딱 그만큼이었다.
그 외 내 부모님과 기억나는 세계는 아쉽게도 전혀 없다.
그 틀 안에 너무도 오래 갇혀 있어
나 역시 딱 그만큼만의 꿈을 꾸고
딱 그만큼만의 행복만을 누리고 살아왔다.
나의 세계가 확장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셋째를 낳은 후
딱 그만큼만 누리던 나에게
그 이상 세상을 꿈꾸게 한 셋째라는 존재
이미 내 안에 꿈틀이며 언제가 때를 노리던
내 안에 꿈꾸던 세계가
세 아이 육아라는 억압 속에
그제야 들끓기 시작
나의 이야기
또 다른 주연
세 아이
나의 이야기는
아직도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나의 이야기에
또 한 번 큰 세계를 꿈꾸게 할
다른 조연을
기다려본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세계다.
부모가 보는 만큼의 세계만 아이는 경험한다.
돈을 들여 해외여행을 가고 돈을 쓰는 무언가를 통해서가 아닌
큰 세계를 보는 마음과 눈을 길러주는 부모가 아이에게 잠재력을 심어줄 수 있다.
부모가 뿌린 씨앗은
부모의 양육관을 통해
내 아이에게 분명 뿌리내리고 잠재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도래한다.
엄마가
꿈꾸는 열정과 도전이
더 큰 세계로의
확장을 의미하고
더불어
내 아이의
꿈꾸는 터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