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에 대하여 2

불편함을 마주하기

by 진주

불편함에 대한 고찰을 하며 가장 생각나는 것은 친정 부모님이다. 불편함을 너무도 잘 견디시는 분들이라 불편함을 평생 떠안고 살아오셨다. 불편함을 떠 안고 사는 것의 결과는 아쉽게도 후회뿐이다. 조금의 위안이라면 불편함을 견딘 댓가로 얻어진 인내심정도랄까?


주말 저녁쯤 친정엄마는 아빠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며 외할머니를 모시고 무작정 나와서 근처 쇼핑몰에 팥빙수를 파는 곳이 있는지 서성이다 결국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도저히 팥빙수 파는 곳을 모르겠다며 어디쯤에서 팔거라고 말씀드려도 '내가 주문을 할지도 모르는데...' 하신다. 마침 저녁을 하던 참이라 저녁해야 한다하니 전화를 끊으셨다. 왠지 신경이 쓰여서 아이들 저녁 먹이고 치운 후 다시 전화를 걸어서 팥빙수를 사서 갈까하니 됐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엄마의 푸념은 시작되었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살았는지 이제야 후회가 된다. 누구 엄마는 카페가서 주문도 잘하고 하던데...' 엄마와 오래된 교회 지인은 운전도 하시고 딸에게 오히려 핫플레이스를 소개시켜주시는 분이었다. 반면 엄마는 카페라는 곳에 갈 생각도 안하시니 카페에 가서 주문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인 것이다. 그런분이 내년 칠순을 앞두고 이제와서 당신의 인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뼈져리게 느끼고 계신다.


엄마뿐 아니라 칠십대 후반인 아빠 역시 후회로 물든 인생에 대해 한탄을 일삼으시긴 하지만 엄마와는 사뭇 결이 다르다.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아빠는 큰 것을 일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여전히 한탄스러워 하신다. 반면 엄마는 소소하게 누릴 수 있었던 일상의 낙을 전혀 누리고 살지 못하신 것에 대한 여한이 많으시다.


단순히 삶을 즐길 여유가 없었고 삶에 대한 재미를 모르고 사셨다고만 생각했는데 친정부모님에게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한마디로 아빠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었고 엄마에게는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가 미쳐 없었던거다. 아빠는 자존심 하나는 건졌으니 그런대로 삶이 흘러가도 붙잡고 싶은 욕심이 없지만 엄마는 다르다. 마주하지 못한 용기들은 엄마에게 이제서야 아우성 치듯이 엄마 내면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유독 올해 엄마는 푸념이 부쩍 잦으셨다. 작년까지는 자신 능력만큼 벌이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존재인양 여겨졌는데 칠순을 앞두신 만큼 여러가지로 힘에 부치니 그만큼 벌이가 따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자신이 소용 없어지는 것에 대한 것들에 자꾸만 위축되시는거다.


피터 홀린스의 <어웨이크>라는 책에서는 불편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전지대를 비유해서 이야기 한다. 안전지대를 지키기 위해서 불편함이라는 요소를 마주하기 보다는 피하거나 견뎌내므로 자신이 고수하는 안전지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마주하는 거 조차도 두려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실 구체적이기 보다는 자신이 형성해온 실체없고 근거없는 뜬구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을 고수하는 자신에게는 그것이 곧 자신의 안전지대를 지켜주는 힘이라 믿을 테지만 말이다.


나 역시 나 스스로 형성해 온 사고의 잡념들로 불편함을 고수하는 삶을 선택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에게서 보고 자란 것을 어찌 나라고 그 이상을 보겠는가. 다행인건 부모의 삶이 정답에 가깝지 않다는 것을 직접 부모로 살아가면서 몸소 느끼게 되며 더 이상 내가 만든 안전지대에 머물지 않고 불편함을 마주하는 것에 대해 직면하기를 택했다. 그 두려움은 근거있는 실체로 접근하게 되면 사라질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두려움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피하려고만 하는게 가장 익숙하고 간편한 것이에게 그저 그런 태도를 고수하며 그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 자위할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안전지대를 고수하며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온 엄마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걸까? 월수금은 막내 픽업을 도와주시느라 우리집으로 오시는데 오늘 팥빙수를 사가지고 오셨단다. 집 앞 이디야 카페가 있는데 팥빙수 주문을 하시고 포장을 해서 아이들과 같이 드신거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뭐라 설명 할 수 없는 기분이 든 것은 무엇인지 나도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팥빙수 이전에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엄마를 건드렸을 거고 팥빙수가 마지노선이 되어 그것을 결국에는 엄마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시도를 하게 한 것일거다. 사실 그 전 주에 우리집에 오시는 길에 버스에서 급하게 내리시느라 카드를 떨어뜨렸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내가 집에 가는 동안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카드정지 하는 방법을 들으신거 같은데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전화를 연결하고 엄마는 대답만 하시고 손으로 이것저것 인증해야 하는 건 내가 해드렸다. 그렇게 카드 정지 신고와 재발급까지 마무리하고 나서 엄마얼굴은 사색이 되어있고 이런걸 내가 혼자 어떻게 하니 하신다. 나는 그저 엄마의 나이가 아니어서일까? 그냥 좀 답답했다. 엄마는 아마도 이제서야 불편함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후회는 있을지언정 그 불편함의 대리자로 자식을 삼고 싶으신 것도 분명히 있으실터이다. 아쉽게도 난 그 불편함까지 떠안고 싶지 않은 딸이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그런 엄마가 오늘 팥빙수를 사서 아이들과 먹은 이야기는 나에게 가히 큰 기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지금 가장 크게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운전인데 불편함을 마주하면서까지 운전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엄마에게 많은 세상재미를 느끼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대부분이다. 서로의 불편함이 마주한걸까?


아마도 서로의 불편함을 마중물 삼아 우리는 각자 고수하고 있는 안전지대를 벗어나고 있는 중이 아닌가 싶다. 운전을 통해 나도 더 넓은 세상으로의 유영을 시작하고 엄마 역시 딸의 운전을 다리삼아 지금까지 알지 못한 재미를 누리게 하는 삶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피터 홀린스 <어웨이크> 진주서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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