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존재에 대한 동요는 과연 무엇일까? 존재감의 불확실성 내지? 존재에 대한 재확립? 또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존재에 탈바꿈의 순간일까? 분명 변화되기 위해 흔들림은 필수적이다. 그 흔들림이 성장이 아닌 실패나 무너뜨리려는 계략이라 여기고 거부하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나 역시 존재의 대한 흔들림은 나를 끌어내리려는 수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아 무의식부터 거부를 보낸다. '내가 맞고 너가 틀리다' 고개를 저어대지만 그저 거부당한 자아에 대한 근거없는 도리짓에 불과하다. 그렇게 뻔할 뻔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마주친 문장을 통해 자아의 거부당함은 한단계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고 스스로 뛰어넘는 도움닫기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욕망의 도달 순간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채워질 수 없는 것이 비단 밑 빠진 독만은 아니다. 바로 인간의 욕망 역시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나에게 욕망은 곧 나에 대한 도발이자 내면 저 너머로 도달인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은 곧 내면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올바른 해답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스스로에게 떠오른 질문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무의식에 의해 재단되어지기 마련이다. 성장을 바라면서도 머물고 싶어하는 것 역시 인간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최초는 그 질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가기 태반이다. 삶은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이 그저 단편적으로 먹고 자고 싸는 일에 그친다면 삶은 결코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삶은 조금 고달플 뿐이지 딱히 큰 무엇이 얻어지는 건 아니다. 그저 삶에 대한 의미를 더할 뿐이라고 할까? 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가는 것과 태어난 것과 살아가는 것에 뜻을 찾으며 사는 차이라고나 할까?
의미를 찾는 자에게는 그 의미가 더해질 것이고 의미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삶이 가리워지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생긴대로 느끼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다.
불행하게도 삶에 대한 의미가 무척 중요한 사람으로 불행중 다행으로 이렇게 글로 풀어 써 삶에 대한 의미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의 한 자락이라 여긴다.
의미를 찾는 자에게는 불안이 떠안겨질 수밖에 없다. 의미라는 것은 흔들림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흔들림이 곧 불안을 말하는 것이고 말이다. 사람은 불안을 통해 일류를 발전시켜 오고 있다. 고로 사람의 내면은 불안을 통해 발전할 수밖에 없다.
불안이라는 것은 요동이자 혼란이다. 내 마음이 왜 요동치는지 무엇에 혼란스러운지 들여다 봐야지만 그 불안을 통해 비로소 내 욕망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나에게 불안은 나를 더 견고하고 든든히 세워나가는 신호탄인 것이다. 매번 그랬다. 타의에 의해서 흔들리는 흔들림은 결국 내 것을 단단하게 만드는 결론을 항상 지어냈던 것이다. 반대로 나 스스로 떠안는 불안은 나의 성장을 내포한다.
문장에서처럼 현존재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은 곧 불안이라는 요소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주체적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란 것이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내 무의식에 잠식당해 왜 또 이런 생각이 들까? 진짜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아니었던 걸까? 라며 절망의 고민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매번 책은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준다. 어쩌면 우리삶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철학은 삶이 절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절망에서 구원시켜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에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절대적 이유이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