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번씩 번뇌가 차오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언제나 수정이 가능해서 매력적이라는게 오늘 아침의 결론이다.
지금의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고 닥친 현실이 버거워서 잡념이 들어차지만 결국에는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방긋한다는 건 내가 가진 긍정성이 아닌가 싶다.
삶은 결국 매순간 긍정을 심는 것이다. 긍정이 아닌 부정이 심길 때 삶은 삶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매번 삶에 긍정을 심을 수 있는건 끊임없는 삶의 잡음이자 소란이다. 잡음이나 소란 없이는 그것들을 잠재울 수 없고 살필 수 없다.
그 잡음과 소란의 실체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스스로라는 것도 말이다.
마흔이후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는 소요속에 거한다는 것이라는걸 살아보며 알게된다. 소요속에 고요히 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고요는 커녕 여기저기 들리는 잡음이 마치 당연한 것인듯 고요를 원하는 스스로가 자책스러울정도다.
그러나 자책을 일삼기에 당면한 현실은 처리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옳곧게 현실을 살아내고 보니 그것이 고요로 걸어가는 지름길이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오히려 고요를 바라며 고요가 주어지길 기다리는 것이 말이 안되는 소원이었음을 삶이 말해준다.
삶은 고요할 수 없는 가운데서 고요를 찾는 것이라고 말이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란 가운데서도 기꺼이 소란을 몸으로 떠 받칠때 고요할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흔 이후의 비로소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란하기 그지없지만 그 소란가운데 고요 삼을수 있게 말이다.
삶은 소란이다.
삶은 소란 가운데 고요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