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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진주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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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Aug 25. 2023

진주서평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가족만큼 우리에게 결정적 손상을 입히는 존재도 없고 엄마만큼 큰 상처를 입히는 존재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것, 그 진실을 숨기기 위해지어 온 어색한 표정과 왜곡된 몸짓들을 살피기 위해, 엄마와 딸 관계에 흐르는 모순과 불일치에 힘겨워하는 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선안남>

엄마와의 관계에 노선이 변경된 건 결혼 이후이다. 결혼 전부터 꽤 오랜 시간 부모님과 지내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기에 엄마와 마주하며 감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감정적으로 불편해지는 건 서로 오고 가며 무언가 소통을 통해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마음에 찌꺼기를 남기는 것일 텐데 엄마와 나의 관계에는 오고 가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같이 사는 남동생과는 껄끄러운 감정이 쌓이긴 했지만 남동생과의 유대관계가 썩 깊은 것은 아니었기에 결혼으로 분리된 이후 그 껄끄러움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신기한 건 부모와 더 정확하게는 결혼을 통해 엄마와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지역에 신혼집을 차렸기에 엄마의 존재감은 더 상실되어야 했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결혼이 후 엄마의 그림자가 내 곁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결혼을 외로워서도 너무 사랑해서도 가 아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마침 남자친구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인데 신혼여행에서부터 불거진 감정적 불편함이 결혼 생활 내내 이러 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차라리 아무런 감정을 맺지 않아도 되고 혼자 자유롭게 노니는 혼자만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신혼 3년 차 만삭의 몸으로 새로 이사할 전셋집을 알아보고 다니는 와중에 여러 면에서 썩 만족스럽지 못한 채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마침 남동생이 집에 들어와 살라며 선심을 쓰듯이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건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부모님 집에서 남동생이 탈출할 구실이었다는 건 후에 알았지만 말이다. 근무지역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남편이었기에 남편은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고 나는 마지못해 그렇게 친정살이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엄마와의 맺어지지 못한 어린 시절의 지지고볶음을 다 크고 나서 내 아이를 키우며 겪게 된 것이다.


워낙 엄마도 나도 독립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스타일이기에 자기 성격대로 성격에 맞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것이고 한쪽이 전적으로 내려놓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기한이 정해져 있던 건 아니지만 엄마와 쭉 살건 아니었기에 내려놓음을 선택한 건 내쪽이었다. 물론 엄마 나름은 엄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모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태어날 첫아이까지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고 가장 미웠던 사람은 사실 엄마다. 나는 아이에 대해 갖는 마음이나 태도 그에 따른 행동까지 엄마와는 정 반대였다. 엄마에게는 오구오구 내 새끼라는 느낌은 단 한번도 받은 기억이 없지만 나는 오구오구 내 새끼 정도가 아니라 니 새끼인데도 그렇게 이쁘냐? 소리를 주변에서 할 정도로 내 아이가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하고 소중했다.


엄마는 할머니라면 으레 갖게 되는 이미지마저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차가운 건 아니지만 엄마는 애정이나 사랑이 없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그 부분은 아빠를 닮아서인지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 많은 사람이고 말이다. 아빠는 강아지를 봐도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는 분이지만 엄마에게는 그 어느 것도 사랑스럽거나 귀엽지 않았다. 딸이 낳은 손주 셋을 보면서도 사랑스럽기보다는 부족한 게 먼저 보이고 그 부족함에 대해서 채우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치시는 분이니 말이다.


엄마에게 자식은 그저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빛내줄 도구 같은 것이었을까? 이제는 그 딸이 낳은 손주까지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엄마의 딸이나 아들이 그다지 엄마가 어깨 으쓱할 정도의 무언가가 되지 못한 아쉬움에 손주들에게 그 기대를 옮긴 걸지도 모르겠다.


마흔 중반을 넘어서는 딸에게 아직도 '살쪘냐?'라며 몸을 살피거나 거기에 더 해 그 딸의 딸에게까지 '살찌면 안 돼!'라는 말을 하는 엄마의 의도는 엄마 자신조차도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시기에 그저 힘없는 말로 사라지지만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속내는 못내 아쉽다.


특히 외모 지적은 엄마들이 흔히 그러나 가장 강력하게 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해동 중 하나입니다. <상처받은 줄도 모르도 어른이 되었다/선안남>


엄마의 이상은 결코 실현되지 못하고 바람으로만 종결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르면서 엄마에게 전혀 기대치를 얹어주지 못한 남편에 대한 소망이 딸인 나에게로 전이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이 되고 싶었지만 그 무엇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칠십 평생 떠안고 사는 분이 여전히 무엇이 되수 있을 거 같은  마흔 중반에 딸에게 기대어 가는 것이다. 엄마는 왜 그래야 했을까?


존재로서 충분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 없이는 딸이 독립된 자아로서 온전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내 존재에 대한 중간값이 지어질 수 있었던 건 아빠다.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거나 애정을 담아내지는 않으셨지만 아빠는 딸에 대한 존재로서의 충분함을 엄마의 입을 통해 나에게 흘려보내셨다. 사실 그것이 딸에 대한 충만함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충만함을 밑바탕에 깐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심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찌 됐던 엄마와는 정반대로 존재로서의 긍정은 분명 심어주셨다. 엄마는 존재에 자기 이상을 더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딸을 대해왔고 말이다.


딸의 마음을 단 한번 이라도 살필 줄 아는 엄마였다면 딱 그 하나가 아쉽다. 돌봐지지 못한 어린 시절의 마음을 품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살피기까지 흘려보낸 세월이 너무도 많은 딸이다. 나라는 딸이 말이다. 여전히 그 마음 언저리에 무엇이 되지 못한 못남에 대한 질함에 한 번씩 위축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딸이 누군데 하고 해 줬던 아빠가 있었기에 엄마를 위해 그 무엇이 되고자 엄한 애는 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쉽게 상처받는 마음을 보듬어주는 어른이 없는 환경에서 아이는 무거운 삶의 방식을 익힌다.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선안남>

오히려 엄마와 같이 살을 맞대고 산 친정살이의 5년은 나에게 유년시절의 보상인 듯이 충족되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돌보지 못한 몸과 마음이 내 아이를 돌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안정되었다고 할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부모님에게 갖는 부정적 정서에 대한 부분이 여전했을지도 모른다. 결핍이라고 여긴 부분에 대한 나의 기억과 부모의 기억은 동일하진 않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결핍을 결핍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하다 여기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그것이 마땅한 듯 그 결핍의 힘으로 나를 지탱했을 테니 말이다. 그때는 살기 위한 방편이었고 지금도 그 결핍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도 분명하니깐.


엄마도 아빠도 자신들에게 짊어진 것 내에서 살려고 애쓰고 발버둥 치며 살아내셨다. 물론 두려움이 더 커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채 한 곳에 웅크리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큰 인생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나 역시 그 두려움에 갇혀 방어막을 친 해 그것이 전부인 세상인양 살아오기도 했지만 마흔 중반을 가고 있는 지금 나의 세계는 두려움을 기반 삼아 앞으로 정진할 힘이 있다. 그 힘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스스로 짊어진 무게감에 짓눌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엄마가 그저 안쓰럽고 지금이라도 한 발짝씩 딸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세계를 벗어나 더 큰 세상의 존재를 느끼시길 바랄 뿐이다. 엄마에게 바라는 것은 딱 그 하나다.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여한을 남기지 않는 것, 과거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이제는 보내주고 앞으로 내디딜 새로운 세계로의 한걸음을 내딛는 것, 그것이 오기로 빚어낸 엄마의 삶에 오기를 날려 보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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