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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Oct 19. 2023

진주서평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 책은 김영하 작가님 북클럽 선정도서로 인기가 급상승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작가님의 공신력에 힘입어 읽어볼까 서점에서 들춰보다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참고 그림에 읽을 흥미가 급 떨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책인데 책읽수다 북클럽에 루피맘님이 읽어보자 하하셔서다시 연을 맺게 됩니다. 역시나 제목과는 상이한 듯한 하지만 결론적으로 인문학적 지식 내지 읽는 이로 하여금 다정함을 일구어내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제목 때문인지 다정함에 대한 키워드로 단톡내에서도 서로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보였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이라 할만하지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초반에 나오는 보노보 보노보노인 줄 알고 물어보니 그 보노보노와 보노보는 전혀 다른 동물이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흔히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하며 적자생존이라 일컬어지는 세상에 이 책에서는 친밀함을 이야기하고 다정함을 옹호하는 보고서를 제시합니다.


40대를 살아가며 있어 적자생존에서는 그다지 생존력을 얻지 못했지만 살아가는 내 다정함과 더 가깝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나지 않고 비교적 정의롭지 않고 제 자신에 대한 날카로움 말고는 모든 것을 유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다지 힘들거나 어렵거나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가족은 예외구요) 다정함이라기보다는 적대감이 없다는 것이 가장 올바른 표현일 듯합니다.





다정함은 결코 부정성은 아닙니다. 긍정성이 다정함을 불러오고 다정함은 곧 긍정의 해석이기 마련이지요. 그런 점에서 전 긍정 성향이라 다정함에 가까운 건 맞습니다.


살아가면서 세상을 어떤 시각과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느냐가 적자생존이냐 친화력과 다정함에 기인한 생존이냐로 갈릴 거 같습니다. 세상을 어떤 마음가짐과 시각으로 바라보고 사는지 한 번쯤 되돌아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남이 적이거나 내가 밟고 일어서야 하는 존재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행자로 본다면 세상이 그리 험악하게 느껴지진 않겠죠?



모든 사람은 각자 짊어진 짐을 지고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모든 이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전 그 말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인간 중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없으니깐요. 각자 짊어진 짐이 다를 뿐이고 그 짐에 대한 해석이 판이할 뿐이지요. 그러기에 모든 이에게 친절까지 아니지만 굳이 적대감이나 위화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니 함께 공존해야 하는 건 진리입니다. 사람뿐 아닌 지구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동식물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다정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들에 핀 꽃도 귀하게 바라보며 이쁘다 할 수 있고 지나가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며 안녕을 바래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너무도 평화롭지 않을까요? 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길가는 고양이나 강아지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고 안녕을 빌어주기는 합니다. 그 순간은 정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니깐요.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이 말 역시 진리인 듯합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처사라기보다는 욕심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많이 갖고자 하고 더 많이 누리고자 하고 남보다 나아지고 싶고 남을 굴리고 싶은 인간 의지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그런 욕망과 욕심이 세상을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개는 사람이 길들이지 않았다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한 것이다



저는 반려견과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데 강아지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합니다. 개는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을까? 애초에 개의 유전자 속에는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난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개는 사람 손이 아니고는 생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양이는 야생에서 살아도 개는 야생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물론 버려져 야생에서 자라는 개도 있지만 그 개마저도 인간 손을 거치면 다정한 반려견이 되는 되더라고요.


개는 인간과 친화적이기에 인간이 생존하는 이상 함께 마지막까지 공존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친화력을 기반으로 인간이 개에 대한 애정으로 개를 돌보는 것도 빠질 수 없습니다. 문득 친화력과 돌봄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협력이 필수인 곳에서는 관용이 지식을 앞선 것이다



지식은 머리의 작용이고 관용은 마음의 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을 머리로만 사는 거 같아도 따뜻한 감성 앞에서는 머리마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도 있으니 말입니다. 삭막하게 내 삶을 일구어 가느냐 따뜻한 온실처럼 내 마음을 가꾸느냐는 머리와 마음의 차이려나요?


지식이 앞서는 지금 시대에 감성을 쫓는 우리의 문화는 무엇을 말할까요? 지금은 감성 마케팅이 전부인 듯 감성 타령인 시대이기도 합니다. 현대인의 다정함의 부재가 감성을 쫓게 만드는 작용이었을까요? 정작 마음과 마음으로 오고 가야 할 감성을 우리는 그 감성마저도 머리에 채우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차가운 따듯함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정함으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폭력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다정함의 어패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살고 그 집단을 강화하기 위해 발전한 것이 다정함의 근원이었다면 도대체 그 다정함의 기준은 어디에 맞춰야 하는 걸까요? 결국 이 책에서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다정함이라는 것 위해 유연함을 더해야 하는 건 우리의 몫이겠지요?


비인간화가 인간의 잔인성을 설명해 주는 중심 요소인간의 잔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타자를 비인간화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다정함이 우리 안의 집단 내에서만 머물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남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를 지키되 너도 지켜지는 안전한 세상을 말입니다. 서로가 지켜지는 세상에 다정함은 누군가의 몫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다정함이라는 것이 넘쳐흐를 수 있다면 우리 안의 유연함마저도 내재화되지 않을까요? 자라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다정하다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어른은 끊임없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다정함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 다정함이 그 아이를 지켜주고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될 테니 말입니다.



자신들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집단은 역으로 다른 집단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게 된다



다정함은 외지고 음지인 곳에 심겨야 하고 비인간화가 틈을 보일지라도 다정함을 그 틈에 메워져야 합니다. 다정하지 못한 것은 비인간화로 비롯된 문제를 불러일으키니 말입니다. 사람에게 다정함이 필요한 건 생존을 넘어 존재 여부에 대한 물음도 되기 때문이죠. 다정함을 내 안의 피워내지 못하는 존재는 결코 스스로 존재에 대한 합당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내 안의 다정함이 스밀 때 비로소 타인의 존중도 스미게 되어 있으니깐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정함도 필요하지만 그 다정함이 세상에 숨 쉬고 있는 모든 것의 존재를 의미롭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당신의 다정함은 어디에 머물러 있나요? 당신의 눈길이 가는 그곳에 당신의 다정함이 심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주서평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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