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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Oct 18. 2023

진주서평 손원평 <타인의 집>




손원평 작가님의 책은 아몬드 이후 두 번째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몬드는 컬처에 가까웠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는듯한 소설이었지만 주인공 연령대 때문인지 감정이입이 되면서 여운이 오래도록 가는 가슴 아픈 소설 중 하나입니다. 그 뒤로 손원평 작가님의 글을 볼 생각을 못 했는데 모나리자 북클럽 해파리님께서 손원평 작가님의 타인의 집을 적극 추천하셔서 손원평 작가님의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결론적으로 아몬드와 비슷한 느낌의 단편소설이었고 저에게는 살짝 다크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재는 공감이 가지만 소설 내용을 풀어가는 문체에 있어서 거부감이 든다고 할까요? 



타인의 집은 단편 모음이라 인물의 서사나 감정선에 대한 충분한 전달력이 부족한 느낌이라 아쉬웠습니다. 마치 그 감정선을 독자가 짊어지게 되는 형국이라 할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타인의 집에는 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는데 4월의 눈과 괴물들, zlp는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족 내 여자, 엄마로 명시되는 인물에 대한 서사인데 묘사되는 모성이 불편하게 여겨질 정도로 작가 개인의 모성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몬드에서도 느꼈지만 손원평 작가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모성은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특히 괴물들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성의 일반적 묘사가 아닌 극단적 묘사에 있어 찜찜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기회만 있다면 외치고 싶었다
결국 당신들도 잡아먹히고 말 거라고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낳고 기르고 또 아이를 보육하는 어린이집 교사로 있는 엄마가 자신의 아이도 괴물들이라 여기고 어린이집에 맡겨진 아이들의 엄마에 대해서도 당신들도 결국 아이들에게 잡아먹히게 될 거라 고백하는  그 심리는 도대체 무엇인지 말입니다



여자는 은밀하게 두 아이를 훔쳐보았다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의미 모를 결과물들을



여자는 자신의 괴물적 존재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 중에 보게 된 것일까요? 자신의 괴물성에 대한 서사가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놓는 아이들에 대해 원망과 자책이 섞인 걸까요? 모성이라는 것이 막연히 알고 있는 것과 아이를 낳은 순간 불거진 모성과의 괴리는 반드시 생길 테지만 어쩌면 모성안에 자기 안의 날 것도 함께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모성이 무엇인지 추측만 할 뿐이지만 엄마가 되어 겪어낸 모성은 극사실적에 가까웠습니다. 엄마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가장 날 것의 모습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 모성이니깐요. 그 모성을 이겨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천진함과 사랑스러움이겠지만 자신의 날 것의 잠식되어 버린다면 아이의 아이다움마저도 자신을 공격하는 비열함으로 비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날 것을 마주하며 잠식되는 건 나 자신 외 모든 것에서 공격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공격성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들이란 여자 자신 안의 있는 무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 jknorman714, 출처 Unsplash


소설 제목과 같은 <타인의 집>은 현시대 집이란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세로 살고 있으면서 남은 방을 세로 주어 자신의 물질적 양산으로 삼고 있는 쾌조씨를 보면 현실적인 인물인가 싶지만 결국 그도 세입자에 불과합니다. 결국 집주인에 의해 그 사람 역시 운명이 뒤바뀌니 말입니다. 한 집안에서 머물면서 개인의 공간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거나 배려를 바라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결코 쉽게 배려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나를 노출하는 것이 곧 나에게는 손해가 되기 마련이니깐요. 씁쓸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는 단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허기의 냄새가
내 인생의 냄새 같았다



요즘 시대에 어떤 것에든 허기지기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돈이 있으면 정서의 허기가 질 것이고 돈이 없으면 돈의 허기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저당잡힌 듯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다른 이의 허기 채워짐은 SNS를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나의 허기는 고스란히 나를 배고프게 하니 말입니다. 타인의 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허기에 절어 있습니다. 세입자지만 또 다른 세입자를 들여 월세를 받는 쾌조씨는 그 돈을 모아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집 같은 집을 사길 바라고 가장 허기질 거 같지 않은 소설 속 나는 자기만의 세상인 안방에 자신의 허기를 물건들을 채우므로 만족스러워합니다. 정작 나는 집 때문에 남자친구와 파혼을 하지만 말입니다. 결혼을 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집이라는 존재가 파혼을 결정한 만큼 위협적이게 다가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허기를 채우려고 했던 쾌조씨에 대해 그 인생관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 tierramallorca, 출처 Unsplash



개인적으로 '상자 속의 남자'가 저를 본 듯 기억에 남습니다. 이 단편은 아몬드의 장면이 연상되는 듯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실제로 아몬드의 연속상에 있다고 마지막 해설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뛰어났던 형이 타인을 도운 순간 형은 환자가 되어버리고 형이 자신을 희생해서 살아온 방식에서 도피하는 듯 자신은 상자 속에 숨어버리는 삶을 선택합니다. 택배 일을 하면서 자신이 나르는 그 상자 속에 정말 갇혀 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상자 안에 자신을 가둬야지만 자신은 안전할 수 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 역시 그런 편이라 주인공이 어떤 심경인지 너무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안전지대에 갇힌다는 건 상처를 받고 싶지 않고 그 상처가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될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상자 밖의 삶을 살았던 형의 모습을 통해 나는 자신만의 상자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는 건 안타깝지만 자신이 살아낼 방법이기에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 현실을 탓하지 않을 수 없으니깐요. 묘하게도 이 인물은 아몬드의 철사와 묘하게 겹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찌르는 철사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자 안에 갇히는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습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지요. 




끝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나를 끔찍하게 짓눌렀다


그렇게 자신만의 상자를 고수하던 나는 형이 살려준 여자아이의 외침에 상자 밖을 나오게 됩니다. 길거리에 쓰러진 여자를 돕던 여자아이가 도움을 요청하며 나를 불러낸 것이죠. 참 아이러니하죠? 그러면서 도무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 고수하던 세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은 오히려 자신을 상자밖에 머물러도 된다고 이끌어주는 계기가 됩니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여겨야 나를 지탱할 원동력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불이해는 나를 지키는 동시에 정지되게 하는지 모르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자아이의 단순한 도움 요청은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니 이 역시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납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결론이자 이야기입니다. 




© s_midili, 출처 Unsplash



단편소설이기에 아쉬움이 없지 않았고 마지막 두 이야기는 생뚱맞기까지 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묘사가 극적인 단편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양한 인물의 서사 속에서 나 외 다른 이의 심리는 불편함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안타까움과 이해를 자아내기도 하니 말입니다. 


제목에서 기인한다면 집이라는 요소는 가장 안전한 동시에 가장 불안전하기도 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포근해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인물들은 가장 불편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집이란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면서 그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내기도 합니다. (4월의 눈)


또 집이란 것을 욕망하며 집을 통해 얻어내고 또 얻어낸 것에 대한 만족감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집보다 크고 커다란 것을 본다면 다시금 집은 내가 머물 안전한 곳이 아닌 나를 자랑스럽게 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국엔 내가 머물 곳도 집이 됩니다. 그 집은 나뿐 아닌 가족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zip)


개인적으로 손원평 작가님의 소설은 여운이 깔끔하진 않습니다. 소재가 주는 무게감도 있을 테지만 묘사 면에 있어서 인간의 너무 깊숙한 심리를 자극한다고 할까요? 보고 싶지 않은 수치를 들춰낸다는 표현이 맞을까요? 특히나 모성과 관련한 이야기는 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집이란 안전하면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집이 여과 없이 드러난 기분이 들게도 합니다. 타인의 집은 모델하우스 같아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은 판잣집같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본모습이니 말입니다. 집도 모성도 날 것 그대로는 우리에게 결코 비춰지고 싶지 않은 내 속살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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