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결국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관계라는 것은 절대불변이라는 사실과 그 절대불변의 관계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삶에 대한 고민이 덜어질 거 같다는 결론입니다.
10대 중반을 가고 있는 큰아이는 그 어느때보다 관계에 대한 열망과 좌절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친해져서 관계를 맺다 불편함을 느껴 손절하고 또 다시 화해하고 하는 과정 속에서 아이는 분명 관계에 대한 의식과 감정을 키워 나갈 것입니다.
중2 아들은 자신이 너무 호의적이라는 것과 그 호의가 호구가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나머지 손절의 대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관계망에서 안전한 거리감을 두는 친구 아들이 그러더군요. 너가 원하는게 무엇이고 너가 편한쪽을 선택하면 된다고 말이지요. 중2에게 반할 뻔 했습니다. 물론 저의 아들이 아닌 아들 친구에게 말이지요. 저 아이는 어쩌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 괜시리 부모가 궁금해지는 건 제가 엄마라서 그럴까요?
그 친구는 가족과 맺은 관계안에서 이미 건강한 관계맺음을 습득했을수도 있고 기질상 건강한 사고를 할 수도 있으니 무엇때문이다 단정할 수 없지만 제 아들과 쭉 친해지길 바라는 엄마 마음을 전해봅니다.
쉬고만 싶은 주말, 읽던 책을 마무리하고자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막내들이 엄마의 자유시간을 넘나들기에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니 쪼르르 딸려 옵니다. 엄마 지금 책을 좀 보고 싶은데 왜 엄마를 따라 다닐까? 라며 애둘러 투정을 부리니 9살 막내가 그럽니다.
"엄마, 불편했구나? 나는 엄마가 좋아서 그러는건데..."
그러면서 문을 닫고 나가주네요. 큰아이 친구가 갑자기 오버랩 되는 건 무엇? 순간 저런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기질인가? 습득된 능력인가? 정말 궁금했습니다.
엄마의 차단을 자기 상처로 곧 가져오기 보다는 그 차단에 대한 것을 상대에게 되물어 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건강한 관계의 기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상대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면서 상대에 대한 아쉬움이나 서러움을 마음속에 담아두기 마련입니다. 관계안에서 직접적인 상처보다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해석하며 단정 짓는 상처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상대에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수긍하고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일부러 거기 두기를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선을 지키며 충분히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 불화는 당연한 것이고 그 불화에 대해 서로 대화로써 풀어낼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론으로 알고 있지만 결코 실생활에서 쉽지는 않습니다.
관계안에서도 서로의 에너지에 따라 더 가까워 질 수도 있고 거리두기를 통해 내 선을 지키므로 불필요하게 새어나갈 내 에너지를 지켜내는 때도 있습니다.
초6딸이 그러더군요. 가족의 불화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고 말입니다. 아마도 냉랭해 보이는 엄마,아빠 사이의 난기류를 포착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역시 관계에 대한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 보다는 상대에게 던지므로서 생각할 여지를 주게 한 거 같습니다.
딸에게 솔직하게 다 말하지는 못했지만 전 현재 남편이나 친정엄마와는 거리두기 중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 에너지를 쓸 만큼 여력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스스로 아끼는 중이지요.
시절인연이라고 하지요? 남편과 엄마에게 시절인연을 이야기하기엔 좀 그렇지만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남편과의 시절이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때라 그저 그의 시절과 저의 시절이 맞지 않음에 그저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이 차라리 견디기 나았기에 그리 결론을 낸 것입니다. 서로의 시절이 맞닿을 날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40대가 되고 시절인연을 알게 되었고 정말 관계안에서 너무도 공감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시절인연으로써 거의 매일 단톡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모나리자 미녀님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 서로의 시절이 완전 맞닿아 그 시절인연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이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새롭게 새겨지며 의미를 더하니 더할 수 없는 깊이의 관계망을 다지게 되는 것이죠.
시절에 맞는 인연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고 혹여나 서로의 시절이 맞지 않아 어그러지더라도 아쉽지는 말자 다짐하게 됩니다. 또 다른 시절인연은 존재하니 말입니다.
너와 내가 만나 우리를 이루어 내고 그 우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나와 너로 존재하는 시간도 반드시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 소설에서 보니 연대하기 위해 서로 다른 자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 같은데 그 맞는 말이 굉장히 날카롭게 새겨졌습니다. 관계안에서의 연대를 서로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이라 여겼던거지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겠구나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하나로 느끼기 위해 내가 너고 너가 나인 것을 바라는 관계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기에 나같지 않은 너에게 실망하고 너가 내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에 관계안에서 토라지게 되는 것이죠.
진정한 관계 맺음으로 인한 연대는 서로 다른 자기의 받아들여짐이라는 것, 그것이 이질적이거나 이물감이 아니게 말입니다.
관계는 서로 다른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해의 과정을 지난하다 여기지 않고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 속에 사람과 관계에 대한 유연성을 길러보는 것은 어떨지 싶습니다. 유연성이라는 것은 유연한 마음으로 수용도 하지만 비수용되는 것에 대한 물음을 던질수도 있어야지 완성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은 상대를 너무 배려하는 것이 상대에게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것, 비수용되는 것에 대한 나의 견해를 상처받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숨기지 말고 표현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