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이방인을 읽었다. 몇페이지 읽다 다른책에 밀려서 내버려두니 어디까지 읽었는지 모르겠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갔다. 읽은 기억이 떠오르며 처음 읽을 때와 다르게 뫼르소를 알아가게 된다. 아직 절반 밖에 읽지 않아서 다 읽고 난 후에 또 다를지도 모르지만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독자로서 가장 아찔한 순간은 타당한 이해의 관계없이 살인을 저지른 부분이다. 설마 총을 쏠까 싶었는데 무려 다섯발이나 쐈다고 한다. 왜? 그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웃 대신에 선의의 마음으로 자신이 대신 죄를 지은걸까? 지금까지 이해한 뫼르소는 그럴 수 있는 인물이지만 또 그러지 않을수도 있는 인물이다.
다만 자신이 한 행위로 인해 자신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은 알았다. 적어도 죄를 지었다는 것과 총을 쏜 것이 죄라는 것은 인식하는 인물이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이방인>
죄인걸 알지만 판사와 변호사 앞에서 변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해받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자신이 죄인줄 알고 저지른 일에 대해 구지 타인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일까?
문득 타인의 이해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인물이 있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애초에 이해받을 생각이 없거나 이해를 바랐지만 무수히 좌절되는 이해의 앞에 몰이해로 자신을 무장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뫼르소는 과연 이해받기를 원한 순간이 존재할까?
자신의 대한 몰이해는 타인의 이해를 더 부추긴다. 타인의 이해에 대한 이해를 말이다. 죄를 지어놓고 십자가를 보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지 판사와 변호사는 신을 들춘다. 그런 신에 존재에 대해 뫼르소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응하는 것이 더 죄라고 느끼는 인물일까?
악의 축인 것인가? 제목처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겉도는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삶의 방편인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 뫼르소는 타인을 의식한다.
나는 그런 소리는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거북했다. (p 17)
나는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사장에게 이미 그 말을 했다는 게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p 33)
그래도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힘썼다. 왜냐하면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p 47)
뫼르소는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것에 대한 귀찮음을 언급한다. 왜일까? 이것 역시 뫼르소가 죄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는 이유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궁금하고 내린 결론은 이해받기를 거부하는 자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이다. 이해를 하기 위한 방편이 되려 이해하고 싶은 자가 아닌 이해를 원하는 이의 신념만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애초에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은 자를 이해한들 뭣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보다는 차라리 몰이해를 선택함으로 각자 자유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이해를 거부하는 자나 이해를 원치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적어도 인간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종인 이상 이해의 과정은 관계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조건을 거부하는 종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저 동물에 불과한 것인가? 사람의 탈을 쓴 동물적 감각만을 가진자?
이해를 거부한 채로 살아자는 자가 짊어질 이방인의 삶을 전혀 개이치않는다면 뭔들? 그럴지라도 타당한 이유없이 총을 겨누는 것에 대한 심판은 분명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심판하지 못하는 자에게 타인은 심판의 책임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과연 뫼르소의 결말은? 결말 이후 또 어떤 생각이 펼쳐질까 궁금하다.
지금까지 개인적용은 이해를 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자에게 이해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는 것! 그뿐이다. 갑자기 뫼르소가 안쓰럽게도 느껴진다. 애초에 자신에게 이해를 바라지 못할 만큼의 사연이 있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