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서평 2025/8
세 엄마, 낳아준 엄마, 키워준 엄마 그리고 딸이 엄마가 되어 쓰는 세 엄마 이야기. 소설인줄 알고 빌렸는데 작가의 자전적 고백이었다. 차라리 소설이라면 나을뻔 했을까 싶게 가슴 아픈 서사이지만 그 서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작가로써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독자로써 위안 삼아본다.
나는 내 엄마들에 대한 마음을 땅 속에 묻고
나 혼자 태어나자란 사람처럼 굴었지만
사실 성장하며 부모와 맺었던 관계의 흔적들이
내 성격과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애초에 아빠라는 사람으로 인한 두 엄마의 불행은 딸에게 대물림 되고 만다. 친엄마와 34년만에 만난 후에야 아빠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 34년간 친엄마에 대한 외칠 수 없는 원망과 미움이 꾹꾹 눌르고 눌러야만 견딜 수 있는 감정의 무덤을 파고 또 팠어야 했을 그 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다.
독자로써는 환장할 노릇이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크게 동요하지 않은 듯 하다. 차라리 여유로운 형편이 된 외할머니와 친엄마의 배경이 한줄기 희망처럼 느껴졌을까? 이건 순전히 독자로써의 시선이다. 차라리 다시 만난 친엄마가 여유로운 형편이라는 것이 말이다. 어떤식으로든지 지나온 아픔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마음의 상처를 지울 순 없겠지만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는 딸에게 여유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분명 안정감을 줄테니 말이다. 적어도 내 것을 내어줘야 하는 거 아닌거 만으로도 말이다.
친엄마는 아빠의 무능력과 술주정으로 인해 두 아이를 내팽게치고 도망을 가버렸지만 작가는 오히려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친엄마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이정임을 나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든 가해자 중 한 명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이라고 여기지만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여자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라고 꼭 자식을 위해서 다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니다.
무책임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내가 운이 없었던 거지.
차라리 자신의 운이라 여겨야 자기가 덜 불쌍하게 느껴졌을까? 아니면 버림받은 것에 대한 자기 방어일까. 그럴 수있다고 여겨야 하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는 그만큼 외면할수도 죽도록 원망할 수도 없는 존재 전부라는 걸 부모는 알았을까?
생존을 위해서 주양육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정신에 새긴다.
내가 친어머니 이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엄마는 떠났고
나는 그 이름을 잊고 싶지만 잊지 못한다
자녀에게 부모는 전부다. 특히나 내 몸에 새겨져 흔적을 남기는 엄마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우주였고 우주로써 존재했던 엄마의 부재는 우주 전체가 소실되는 상처를 기어코 자녀에게 만들고 만다.
나는 사람들의 문장 말고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나를 낳은 여성과 분리되었다.
엄마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는 한 명의 개인일 뿐이다
어떤 선택을 자유롭게 할 자유를 얻기 위해 그에 따른 권리나 책임을 충분히 이행해야 한다. 충분히 도리를 하고야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애초의 자유가 보장된 이는 없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자유가 방종이 될 뿐이니.
친엄마는 새엄마의 존재 여부가 엄마 자유의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적어도 아이들을 보살펴줄 여자가 존재는 했던 것이니 말이다.
세 엄마 중 가장 인상에 남고 가장 가슴 아픈 인물은 오히려 새엄마였다. 자기 자식도 낳지 않은 채 남자의 남은 두 아이를 알뜰살뜰하게 키워내고 남편에게서 도망칠 때에도 남편의 어린 자녀에게 선택권을 준다. 원하면 같이 가도 된다고 말이다. 버리고 가서 자신의 새 삶을 살아도 새엄마는 남편의 아이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미술이 하고 싶다던 딸에게 기꺼이 주변에서 돈을 꾸어 학비를 대어주고 넌 잘 될 줄 알았어 라고 하는 새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돌본 것일까? 그 새엄마의 지극정성은 결국 아이들이 장성한 뒤 입양이라는 절차를 통해 새엄마의 보호자로써 당당히 호적에 자국을 남긴다.
작가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자신을 져버리지 않은 이유는 분명 엄마들의 존재다. 자신의 인생을 찾아 기꺼이 버리고 갈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가진 친 엄마,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이지만 친자식만큼 최선을 다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지켜준 새엄마. 그렇게 자유와 책임을 다 한 존재들은 작가만의 언어를 가지게 하고 그 언어를 풀어내며 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속되어 자유을 뺐겨도 안전한 울타리에 거하고 싶었을 작가는 남편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또 다른 파국을 맞게 되지만 오히려 진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면 할 수 있구나
돈이 없어서, 여자니까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니까
할 수 없다고 여긴 일이 많았구나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 남는 것이다. 다만 같이 기대어 가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 일뿐. 하지만 안정에 대한 욕구가 큰 여성은 남편이나 자녀에게 기대어 가고 싶은 법이다. 작가에게 첫번째는 엄마였고 그 엄마의 부재를 새엄마가 채워줬고 그 다음은 남편이었을텐데, 그 남편마자 사라지고 작가가 느꼈을 상실감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새엄마와의 입양 절차로 인해 친엄마와 34년만의 끊어진 고리는 다시금 기대어 갈 수 있는 존재의 발견이자 새로 이주한 제주도에게 마주한 자기효능감은 작가 스스로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충분히 이행하게 한 가능성이자 증거가 된다.
나는 주위 환경을 바꾸겠다는 선택을 했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감탄은 매일 마음에 스며들었다가 흘러간다.
이전보다 커다랗고 강해진 마음을 느낀다.
어머니들에게도 젊은 시절 삶을 바꿀 선택지가 여러가지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까운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렸다.
그 안타까운 시간의 여정이 작가 자신을 키워낸 것이라는 것, 그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희생이자 축복이 아닐까 싶다. 비록 여의치 않은 환경과 매일 귀를 틀어막어 숨기고픈 어린 시절이었을지언정 친엄마와 새엄마를 통해 그렇게 엄마로써 작가는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이자 작가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