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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진주서평

2025/6

by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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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흰색? 눈? 흰이 기껏해야 눈밖에 떠오르는지 않는 걸 보니 흰이라는 개념이 어쩌면 가닿을 수 없는 것의 거리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문장 속 '표백'이라는 단어에게서 불현듯 '흰'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흰'에 관련한 내 서사를 계속 떠올려 보았다) 더러운 때를 지워 새하얗게 만드는 표백으로써의 흰을 말이다. 눈에 보이는 더러움은 표백제를 때려넣어 탈색하듯 새하얗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욕실이나 기름 때 묻은 주방을 청소할 때 탈색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 더러움이 마치 나에게 들러붙어 내 존재가 되어버리는 양 말이다.



'흰'이라는 완결함과 완전성에 대한 의미는 표백제를 사용해 탈색이란 과정을 거쳐 그렇게 '흰'으로 탈바꿈한다. 한번의 과정이 아닌 시시때때로 자행되어야 하는 탈색의 고통을 표백제에 강렬한 냄새와 묵은 때가 지워질 때까지 문지르느라 손목에 알싸한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말이다.



외부적 '흰'의 완성은 고스란히 신체적 통증을 남긴다. 시시때때로 말이다. '흰'에 대한 개인적 열망으로 인해서 말이다.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걸까




심장을 관통해 빠져나오지 않은 단어들이 기어코 문장으로 완성되어야 심장이 그제서야 안정된 맥박을 찾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아릿함이 온다. 삶과 인간에 대한 매섭지만 알싸한 맛이 베어나온다.



거기에 '흰'이라니. 매섭고 두려운 것을 '흰' 거즈로 덮어버리고 싶은걸까? 혹은 알려지지 못한 고통의 흔적을 가만 '흰'거즈로 덮어주고 싶은걸까?



말이 되지 못하고 휘발되어 버린 것들에 '흰'거즈를 살포시 덮어 조심스럽게 말이 되지 못한 말이 썩은내를 풍기지 못하도록 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썩은내가 아닌 그 썩어질 것에 대한 조용한 위로를 말이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흰'이라는 열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고쳐질 수 있음을 다시 흰 환부로 되살아 날 것이라는 희망을 '흰' 거즈를 통해 바래보므로 그렇게 나음을 입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죽지말라는 간절하지만 묵직한 울림이 마음속에 번진다. 알아서 사라져주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다 정말 사라져버린 예정일 일주일 차이로 같이 임신을 한 친한 동생의 사산 소식 이후 제발 죽지마의 간절함으로 바뀐다.



유아시절까지도 갑자기 사라질까봐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을 한때 품었던 죄로 진짜 사라지게 될까봐 조마조마했던 남몰래 간직한 죄악의 흔적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바랬던 마음의 근간은 준비되지 못한 여리고 여린 마음의 흔적이었음을 정말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닌 간절함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살아낼 근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사라지길 바란 건 아기가 아닌 나였을거고 사라지지 말기를 바랬던 건 사라지지 않고 끝끝내 나를 통해 연결된 것들에 대한 미련이자 나를 벗어나면 안되었던 존재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뒤이어 온 생명은 앞서 간 생명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야 만다. 자신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일 뿐인데도 잉태되어지는 순간 새겨진다.



'달 떡같이 희고 이쁜'아기를 잃은 엄마는 다시 찾아올 아이를 지켜내어야만 하는 사명과 책임에 사력을 다하고 대신 태어났을 아이는 엄마에게 무거운 책임을 더 지우지 않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살아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미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채 태어난 자는 살아내야만 하는 존재로써의 의무감을 흰 강보에 쌓이는 순간 알아채 버린다. 버둥거릴 수 있지만 버둥거리면 되지 않을 존재로 말이다.





이곳에 와서 그녀는 들었다.노르웨이 최북단에 사람들이 사는 섬이 있는데, 여름에는 하루 스물 네 시간 해가 떠 있으며 겨울에는 스물네 시간이 모두 밤이라고 그런 극단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곰곰히 생각했다.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까?



흰 밤과 검은 낮. 흰 낮과 검은 밤. 무엇이 더 견딜만 할까? 검은 낮은 희어버린 밤이 두려웠고 검은 밤은 희게 밝을 낮이 두려웠다. 밝게 날이 희는 것이 희망이 아닌 고통일때가 있었다. 더 이상의 희망에 기댈 수조차 없을 불행의 늪에서 말이다. 온갖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빛이라고는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빛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댈 곳이라고는 무심히 떠오르는 흰 새벽이었을까? 흰 새벽을 맞이했다는 건 또 하루를 견디어 냈다는 것,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것뿐이었지만, 흰 새벽은 쌓이고 쌓여 희망이 된다는 것은 날이 희어지는 것을 기어이 내 눈으로 보고야 말 때이다. 기어코 흰 새벽은 도래한다.




궁극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흰'은 언제라도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현존을 지워버리고 근원적인 차원으로 내려가 다시 시작하기를 강요할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흰' 해설 中




'흰'은 흰눈의 설렘이자 모든 것을 덮어버릴 위력의 극단성도 포함한다. 양날의 칼 같은 '흰'은 어쩌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인간적 삶을 껴안을 수 있을까?"라는 책 속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면서 인간의 삶을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찾았다.



선과 악은 동시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동시성을 목도한 자만이 진짜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조금이라도 유연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락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저마다의 고통속에서도 우리는 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것도 약한자만 쓰러지는 것이 아닌 그저 앞으로 나아갈, 흰 새벽을 마주하는 자는 삶으로의 유영을 매일 기어코 해낸다.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에 포개어져 인생을 이루고 살아낸 인간이 되게 만든다. 결국은 살아낸 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흰'은 말이다. 살아내지 못한 안타까움이나 말이 되지 못한 채 묻힌 현존은 '흰' 종이에 새겨지면서 말이다. 그렇게 동시성을 갖게 만드는 '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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