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
주말에 가볍게 소설 한 권 읽자 싶어 선택한 소설이야기 시작합니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라 단숨에 읽기 딱 좋습니다. 다만 읽을수록 기괴하다는 단어가 떠오르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는 헉! 이게 뭐지? 라는 개운치 못한 기분이 살짝 듭니다.
내용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그렇다고 평범하다고 하기엔 찝찝한 그 무엇이 있다고 할까요? 영화로 제작해도 괜찮겠다 싶지만 찝찝함은 가지고 가겠구나 싶은 소설이라고 할까요?
작가의 말을 보니 장편 소설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단편의 느낌으로 5편의 이야기를 구성하긴 했지만 소설의 짜임새나 구성은 살짝 아쉽게 느껴집니다.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빌리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제목이 다했다 생각하고 제목처럼 저 역시도 사생활을 취미로 가져볼까? 아니 이미 벌써 약간의 취미로 즐기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부분은 소설을 읽어야지만 이해가 되실거 같아요.
등장인물 보일은 아이넷을 키우는 가장입니다. 요즘 시대 아이의 존재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가장의 무게감은 날로 커가는데 아이가 넷이라니 그 무게감은 아이셋을 키우는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일터에서 집으로 자신은 온데간데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자신의 삶에서 보일은 일탈을 꿈꾸게 됩니다. 바로 여장을 하는 것으로요. 다른 취미 생활도 아니고 여장을 한다는 것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여 살짝 뜬금없긴 합니다.
아내인 은협이 이른 추위에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다 보일씨의 명품 구두가 담긴 상자를 보게 되며 여자 구두이니 당연히 바람을 의심하지만 차라리 바람이 나았으려나요? 자신의 사생활 도구들인 여자 옷가지를 차마 눈에 띄는 곳에 둘 순 없어서 원룸까지 얻어서 은밀한 취미 생활을 즐깁니다. 아내인 은협은 다이소에서 천원짜리 나무젓가락을 사서 다이소 물건이 아닌 것처럼 포장을 해서 단가를 올려 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자신이 고작 삼만 원 돌려받기 위해 진료비 계산서로 씨름하는 동안,
딸아이를 병원 바닥에 오줌 싸게 만드는 동안,
보일 씨는 비싸고 남부끄러운 취미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부부들의 고충이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는 한푼이라도 아끼고 벌어서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싶어하고 아빠들은 가정 경제를 책임진다는 이유로 자잘한 것들에 대한 자유를 만끽하니 말입니다.
소설에서만이 아닌 저희 남편의 경우도 끊임없이 택배가 옵니다. 바로 자동차입니다. 미니차를 비롯한 모든 장난감 자동차를 말입니다. 이제는 쇼케이스까지 구입해서 사다모은 것들은 전시를 합니다.
특별히 취미도 사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 그냥 내버려두긴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이 아닌 것들에 고운 눈길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은협씨의 마음이 제 마음이겠지요? 소설속에서 은협은 정신줄을 놓기도 합니다. 번아웃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를테면 은협은 이런 사람이었다.
남편이 여장을 해왔다는 사실보다,
그 취미생활에 드는 비용이 값비싸다는 데 더 분노하는 사람
소설에서는 은근 현실적인 문제 언급하지만 소설내 현실적인 배경을 위한 구실일뿐 현실 문제를 제시하려고 하는 의도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자잘하게 모든 요소를 언급하니 맥락이 없다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현실에서는 모드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타당성이 영 없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이기에 우리가 공기를 들이마시는 지 모르고 사는 것처럼 현실의 문제도 분명 있지만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부분을 글로써 딱 집어내니 굉장히 난잡해 보인다고 할까요? 문제투성인줄 알지만 문제투성이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자조섞인 웃음이 나오고 끝가지 찝찝함과 구린 구석을 풍기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의 여지도 주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소설속에 등장하는 은협의 아이넷의 말과 행동마저도 전혀 어린이스러운 천진함보다는 금쪽이에 나올 법한 스토리 구성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엄마를 이겨먹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인 애였다.
이 애는 어쩔 수 없이 은협은 인정해야 했다.엄마를 조종할 줄 알았다.
아아, 이 애를 괴롭힐 때 은협은 가장 살아 있었다.
이 소설은 이해의 구도보다는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느낌이 강합니다. 소설내 지지 않고 이기고 싶다는 표현은 애고 어른이고 다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랬어야 했었나? 이랬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소설 곳곳에 뭍어 납니다. 마침표를 찍은 아쉬움이 아닌 여전히 물음표에 머물고만 있는 아쉬움과 후회의 낱말들을 은협을 여전히 힘들게만 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웠으면
주유소는 건재하지 않았을까?
그때 정수리 가발 사는 걸 말리지 않았더라면
은협은 이제는 익숙해진 방식으로 후회했다.
과연 소실이 끝난 후에 은협은 달라졌을까? 자신이 짐작하는 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 무방비의 무기력증이 아닌 자신의 대리자였던 그 언니처럼 닥처올 자신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대처할까요?
지극한 현실을 살아내며 잠깐의 유튜피아로 자신을 탈피하는 남편 보일과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걱정하며 살아가되 그 현실에 안주하며 때론 자신을 타인에게 양도하면서까지 현실적 문제를 탈피하려는 은협은 같은 현실 속에서 서로 다른 자아를 꿈꾸며 하나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명된다. 그들을 이어주는 아이넷과 말입니다.
둘이 결혼한 이유는 '두 줄'이 아니었다.임신 공격도 아니었다.
그것은 최초에 한하여 유효한 개념이므로
각기 다른 의도가 결국 같은 결과를 빚어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부부는 천생여분이었다.자식을 넷이나 뒀다는 것도 그 증거였다.
여장을 하는 보일씨도 은협을 대신해 은협 대리자가 되어주는 소설 속 화자도 기괴하다는 느낌을 여지없이 주지만 그렇게해서도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감을 덜어내거나 떼어내려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끝까지 개운함을 주지 않아요. 지극히 현실을 여과없이 들어내기만 할 뿐 그 현실에 소설 속 화자처럼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 해결책 없음, 희망없음을 독자에게 여과없이 비추는 작가가 살짝 야속할 지경입니다.
특히나 청약을 위해 셋째를 일부러 가진다는 청약키즈에 대한 언급은 하늘에서 떨어지듯 뿅 하고 생겨 태생부터 엄마의 근심거리를 한가득 선사한 우리 셋째를 생각하니 억울하기까지 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생겨 차마 어쩌지 못하고 낳고 키우는 내내 엄마의 한 어린 그 심정을 작가가 한자락이도 알았다며 저리 가볍게 썼을까 싶은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모든 셋째 아이가 청약 키즈는 아니었지만 모든 청약 키즈는 셋째 아이였다.
길지도 않은 소설에서 민낯의 현실과 그 현실에 거주하는 자로써 불편함을 호소하게 된 소설이지만 취미로 사생활을 즐기고 싶은 보일의 마음과 어쩌지 못하는 현실에서 구원자를 자처하는 이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은협이 부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