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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Sep 15. 2021

불안을 견디는역량

친정부모님 이야기

나이 마흔이 지나고 나니 부쩍 연로해진 부모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 시댁은 시부모님 건강 문제, 친정은 친정부모님 부부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좀 전에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료함에 전화를 하셨나 싶었는데 갑자기 울먹이신다.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도망가고 싶다고 하신다. 오히려 도망갈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은 잘 견디고 넘어가시더니 노년에 와서는 참고 참은 인내가 바닥이 나시는 듯하다. 친정부모님 문제는 치매가 오신 외할머니를 모시면서 불거졌다. 어쩌면 그동안 참고 견딜만했던 친정부모님 문제가 할머니를 모시게 되면서 증폭제가 되어 버린 거다.


친정아빠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그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지금도 외로움을 하소연하시는 분이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사랑을 주기보다 미움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평생을 당기고 미는 관계를 이뤄오고 계신 거다. 결혼 생활 사십년이 넘으셨으니 둘 중 한분이라도 포기하고 살만 할 텐데, 두 분 다 기운이 너무 쎄서인지 친정아빠 칠십 후반에도 사랑을 갈구하시고 곧 칠순을 맞는 엄마는 여전히 독야 청천이시다. 그런 와중에 치매가 오신 외할머니까지 모시며 엄마의 눈총조차 받기 힘들어진 아빠는 더 아기처럼 사랑을 갈구하시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신 거다. 아직까지 일을 하시는 친정엄마는 일찌감치 일을 접고 집안에 계신 아빠가 집안일이나 할머니 돌보는 것을 거들어 주길 바라시는데 그러질 않으니 불만은 더 쌓이면서 악순환이 거듭되는 상황이다.


여러모로 살펴봐도 외할머니를 모신 후 아빠가 달라지신 거라 외할머니 거취에 대해 여러 번 말씀을 드렸음에도 엄마는 한사코 아빠가 아니라고 했다면서 3년이 지나도록 외면하고 계신다. 어쩌면 외면하는 과정 중 치러야 할 용기에 대한 자신이 없기에 망설이시는 듯해서 딸인 내가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친정부모님은 너무도 잘 견디는 분들이다. 그냥 그렇게 살다 보니 그게 사는 방법인 줄 알고 아직까지도 살고 계신다. 노년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결코 나은 삶의 방법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도 여러 차례 겪으셨음에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고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기엔 그동안 외면한 무수한 용기가 차라리 불편을 감수하는 게 나을 만큼 굳어진 거다.


나 역시 살아보니 친정부모님의 방식으로 살고 있음을 마흔 전후에 깨닫게 되면서 의지적으로 달리 살려고 노력한다. 내 아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의 삶의 태도를 물려주고 싶진 않았다. 미련스럽게 더 나은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참고 살아온 삶은, 노년의 때에 너무 큰 회한으로 후회만 남긴다는 걸 부모님을 통해 봐 왔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참는 거 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미련스럽게 힘든 걸 견디냐고 말했다. 엄마가 스스로를 뛰어넘길 간절히 바랬다. 막상 그 선을 넘고 나면 별거 아니구나 느낄 것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엄마의 삶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친정아빠는 더한 분이다. 감당하지 못할 건 아예 쳐다도 보지 않고 스스로를 달래며 애써 위로를 한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왔기에 친정부모님이 살아오신 동안 큰 사고나 자잘한 이벤트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시긴 했다. 오늘 문득 그렇게 살아온 삶이기에 지금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행도 역량치에 따라 견디는 강도가 결정되는 거다. 불행을 못 견디기에 도약하지 않고 정지된 삶은 안정을 허락할 순 있어도 그 불행을 견디고 뛰어넘으며 얻게 되는 견딜힘은 결코 생기지 않는 것이다.


문득 시댁 부모님이 생각이 났다. 시댁은 지금 시어머니의 하반신 마비로 인해 손위 시누이가 시어머니를 7개월째 병간호 중이고 아버님은 손위 시누의 어린 두 아들을 돌보고 계신다. 주말에는 남편이 가서 시누이와 교대를 하고 시어머니를 돌본다. 신기한 건 6개월 이상 지속되어 힘들 법도 한데 시댁 식구는 어느 누구 하나 불평을 하거나 푸념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어떻게든 걷게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로 시누가 사방 팔방 알아보며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니고, 시아버지 역시 칠십 넘은 연세에 7살, 5살 남자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으실 텐데 묵묵히 견디고 계신다.


왜 이렇게 다를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오히려 시댁이 이상한 집이라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시아버지에 대한 태도나 주변 사람을 대하는 말투나 태도를 보며 만만치 않겠다 싶었지만 다행히 사랑하는 아들의 아내라 나를 아들과 똑같이 대해 주신다. 하지만 그 외 사람에게는 쌈닭이시다. 내가 있는 상황에서도 시누에게 욕을 하실 정도니...


그런 시댁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정상적이라 생각했던 친정이 오히려 역기능이었던 거다. 시댁은 기본적으로 아버님이 생계를 책임지시고 아직까지도 자식에게 의지하려는 생각이 없으신 분이다. 반면 우리 집은 부모님이 같이 일을 하시긴 했지만 엄마의 몫이 더 많았고 결국엔 15년 전부터 일을 놓고 집에 계신 아빠 대신 친정엄마가 생계를 이어가고 계신다.


집안에서 아빠가 돈을 벌고 집안일을 담당하는 엄마라는 가부장적 사고가 지금 시대에는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부모님 세대에서는 기능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역기능에 가깝다. 그러기에 역기능으로 인한 문제도 불거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친정엄마 입장에서는 돈까지 벌며 집안을 이끌어 가는데 그 외 집안일을 도와주기는커녕 사랑 타령이나 하는 아빠가 미울 수밖에 없는 걸 안다. 나 같아도 그럴 거 같다. 밉고 억울하고 괜히 팔자타령까지 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아빠가 우선시 된 적 있어?"


내가 지켜봐 온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를 마음으로 존중하거나 이해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불평불만 투성이었고 만족하지 못했다. 엄마 욕심만큼 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컸기에 가지고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 거다. 내가 이렇게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결혼 생활 내내 친정부모님 부부 사이를 우리 부부에게 자꾸만 투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남편으로 보이기보다 친정아빠로 보이고 내가 자꾸 친정엄마로 보인 것이다. 나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엄마처럼 남편에게 불만족하며 인생의 불행만을 떠안고 살았을 거다.


엄마에게 '엄마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차서 아빠가 자꾸 밉게 보이는 거라고, 엄마 마음에 미움을 해결해야지만 아빠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도 했다. 엄마는 어느새 말이 없어지면서 "알겠어"라고 하시면 전화를 끊으신다.


내가 부모님과의 투사를 끝낸 후에는 이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불편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엄마, 아빠 두 분이 풀어내야 할 문제이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면 되는 거니 말이다. 다만 속으로 응원했다. 제발 엄마 용기를 내어 보라고, 엄마 앞에 마주한 선을 넘어 보라고 말이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행은 당당히 맞서 싸우는 게 불행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최고의 방법인 듯하다. 외면한 불행 치가 한꺼번에 노년에 들이닥쳐 광풍에 휘몰아치는 뱃놀이에 휘청이지 않도록 말이다. 친정엄마를 위한 기도를 참 많이 했다. 얼마나 고생하며 사신지 알기에 노년에라도 제발 편해지길 말이다. 그런데 정작 엄마 스스로 그 불행을 붙잡고 계신다. 제발 이제는 다 내려놓고 몸과 마음의 자유를 얻으시길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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