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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r 20. 2023

갑자기 찾아온 비염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히고..

40을 전후로 자주 아팠던 것 같다. 물론 큰 병은 아니었고 잦은 감기와 수시로 찾아오는 두통, 조금만 무리하면 몸살에 걸리고 임파선이 부었다. 그러다 보니 약을 먹거나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 횟수도 늘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쯧쯧 나약한 것 같으니라고.." 하며 놀려댔다.



한편, 남편은  예전부터 비염이 심했다.  그래서 환절기만 되면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다. 며칠새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드디어 봄이다. 꽃가루와 먼지,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크게 벌어지는 일교차 때문에 남편의 재채기가 시작되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살며시 칼날을 꺼내 들었다.



"쯧쯧. 어릴 때 너무 깨끗한 집에서 살아서 그런가? 사람이 먼지도 좀 먹고, 세균에도 노출이 되고 해야 면역력이 좋아지는데 말이지." 하며 남편의 몸을 비웃곤 했다. 심지어 코를 훌쩍이는 남편에게 "코 좀 풀지 그래? 시끄러워 죽겠다." 하며 잔소리까지 퍼부었다. 그런 치사한 복수의 잔소리는 대를 이어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며칠 전부터 코가 막혀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그랬다. 자다 말고 짜증을 내는 아들에게 "거봐. 엄마가 끓여준 작두콩차 버리지 말고 다 마시라고 했지. 그리고 운동 좀 해. 살이 쪄서 더 그런 거야." 하며 위로를 가장한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참 못난 엄마가 따로 없다.



결국 날이 선 칼날에 내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며칠 전부터 아니 얼마 전부터 환절기만 되면 코가 좀 막히는가 싶더니 재채기까지 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비염이 아니냐고 물었다. 재채기 한번 했다고 비염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 비염이 아니라고 우겼다. 태어날 때부터 비염은 타고나는 것이고, 나쁜 생활습관이나 환경이 면역력에 좋지 않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오만방자였다. 어젯밤 코가 막혀서 30분마다 잠에서 깨는 것은 물론이고 콧물이 줄줄 흘러도 빈틈하나 없는 콧속 덕분에 코를 풀 수도 없게 되었다. 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에도 양쪽 코가 다 막혀서 입으로 숨을 쉬어야만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어젯밤 결국 약을 먹었다. 비염이다. 그런데 효과가 하나도 없다. "비염이 맞는 걸까?' 또 의심해 본다. 혹시나 하고 작두콩차를 끓여서 홀짝홀짝 마셔본다. 제발 내 코가 뚫리길 바라본다.



시력이 좋지 않다 보니 코와 귀, 그리고 손의 감각은 나에게 가장 쓸모 있고 소중한 녀석들이다. 그중에서 코가 마비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모양만 눈이고 코일뿐, 눈과 코가 쓸모가 없어졌단 말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지금 나는 코의 소중함까지 느끼는 중이다. 주방이나 화장실의 곰팡이 냄새나 음식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졌다. 위생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고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동에 들어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럴 땐 내 기억력을 좀 더 긁어모아야 한다. 왼쪽에는 김치 그위에는 피클, 오른쪽에는 달래간장, 그위에는 단무지무침.. 이런 식으로 기억해둬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면서 기억력도 많이 나빠진듯하다. 어떤 날은 싱크대 하부장에서 방울토마토가 들어있는 밀폐용기 하나를 꺼내고선 깜짝 놀란적이 있다. 전날 밤 씻어둔 방울토마토를 밀폐용기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는다는 게 그만 싱크대 하부장에 넣어둔 것이. 전날 밤의 일이 기억에 났으니 적어도 상상하는 그것은 아니리라 믿을 뿐이다.



무엇이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 코 좀 막혔다고 예민해지는 남편을 보며 한심해하던 내 모습이 더 한심할 뿐이다. 코가 막히니 코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것 같다. 양치를 하다가 코로 숨을 못 쉰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입으로 숨을 쉬는 순간, 매운 치약이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목캔디를 먹어도 이렇게 매운맛은 아닐 테다. 급하게 대충 마무리를 하며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느 날 저녁, 티브이를 보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양치알람이 울렸다.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는 둘째와는 달리 첫째는 여전히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야. 너 양치 알람 울렸는데 아직도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가."


"아니.. 코가 막혀서.... 양치하기 얼마나 힘든데.."


"코가 막혔으면 입으로 숨을 쉬면 되지. 너" 양치하기 귀찮아서 일부러 핑계 대는 거잖아.


했던 내 모습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막힌다. 항상 나만 불편하고 힘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력의 불편함은 온데간데없고 코막힘이라는 새로운 불편함에 허우적대며 지난날을 반성하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의 무관심 속에서 상처를 받았을 남편과 아들을 위해 작두콩차를 잔뜩 끓여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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