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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r 23. 2023

아파트 누수에 대처하는 법

고릴라는 바나나를 좋아해

'드르륵드르륵 드르르르르르륵'


윗집일까? 그 옆집일까? 아니면 윗집의 윗집일까? 조금 전부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드릴소리가 들린다. 이러다가 중에는 천장을 뚫고 들어온 드릴과 눈을 마주칠 것만 같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또 이사를 나갔나 보다. 새로 이사 올 사람은 누구일까. 어차피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 이사를 언제 오는지도 알 수가 없고 하물며 저 리가 인테리어공사 때문에 나는 소리가 맞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 누수공사일지도 몰라. 물이 세는 곳을 바로 찾아야 할 텐데..' 괜한 오지랖도 떨어본다. 어느새 정체불명의 드릴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나를 발견하고는 얼마 전의 일이 다. 우리 집에서 시작된 누수가 아랫집으로 세면서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고 그 덕에 누수탐지업체를 부르고 바닥을 드릴로 깨부수며 난리도 아니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설명 절 때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는 100km로 1시 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갑자기 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차로 30분 이상 떨어진 곳에는 잘 가지 않게 되었지만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는 멀미약을 먹여서라도 꼭 대구에 다녀오곤 했다. 대구에 가는 날이면 점심도 해결할 겸 항상 들르는 가게가 있다. 바로 돈가스집이다. 첫째는 돈가스를 싫어하지만 첫째가 좋아하는 새우튀김을 두 개나 올려주는 우동이 있고 남편이 해장국 같다며 좋아하는 김치찌개 우동도 있어서 꼭 그 가게에 들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게에 들러서 맛있는 돈가스와 우동을 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관리사무소인데요. 아랫집에 물이 샌다고 해서요. 일단 복도에 있는 보일러실물 좀 잠그겠습니다. 명절 지나고 오시면 꼭 확인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누수라는 말에 어젯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이 났다.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하나는 우리 집 베란다 바닥에 물이 가득 차서 출렁이는 꿈었고 또 하나는 어디론가로 가려고 차를 탔는데 내가 앉는 자리아래에 발목만큼 물이 차서 당황했던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꾼 내가 참 대단한 사람 같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내 예지몽은 놀라울 때가 많았다. 그 놀라움에 심취해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참고 있는 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꺼내 아랫집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2층인데요. 물이 또 셌다면서요. 죄송해서 어떡해요. 저번처럼 다용도실인가요? 많이 센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네, 맞아요. 똑똑 떨어지는데 물건 다 빼놨어요. 어쩔 수 없죠 뭐."


"에고.. 정말 죄송해요. 대구에서 이틀뒤면 돌아오는데 빨리 처리해 드릴게요. 일단은 관리실직원이 수도밸브를 잠갔다고 하니까 더 이상 세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도 대구로 가는 차를 다시 돌려서 집으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차의 종착지가 시댁이어서는 절대 아니다. 절대..!



이틀밤을 양가에서 지낸 뒤 토요일아침, 밥을 먹자마자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오르자마자 누수가 생각이 났다. 이제부터 다시 걱정이 시작되었다. 제발 간단히 해결되길 바라고  바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뒤져서 나오는 업체마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설명절과 주말이 겹치면서 당장 오겠다는 업체를 찾지 못했다. 결국 업체는 포기하고 어떻게든 우리의 손으로 해결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2년 전쯤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땐 보일러 배관의 문제였다. 보일러 배관을 새로 교체해 주었고 그 뒤로 더 이상 물이 세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은 위치여서 아무래도 또 보일러 배관이 문제인 것 같았다. 남편은 보일러 배관의 연결부위의 틈이 벌어지면서 센 것 같다며 그 부분을 좀 더 단단하게 조여주고 고정해 주고는 이제 더 이상 세지 않을 거라며 배관만큼이나 단단한 의지를 내비쳤다.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왜냐면, 그날은 올해 들어서 가장 추운 날이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부터 시작된 안전안내문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 엄마. 너무 추. 몸이 덜덜 떨려."


"그렇지? 일단 패딩 벗지 말고 양말도 신고 있어 봐."


이미 이틀 동안 비웠던 집안은 으슥하기까지 했다. 내가 지금 저 바닥에 누우면 곧바로 영안실이 되는 거였다. 남편을 믿고, 아니 보일러의 호스를 굳게 믿고 수도를 열었다. 그리고는 얼른 보일러의 전원을 켰다. 방바닥은 금세 따뜻해졌고 그 틈을 타서 나는 친정에서 가져온 반찬을 정리하고 가방에 꾸꾹 눌러 담은 빨래들을 꺼내서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시작했다. 여자들은 나갔다 오면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엉덩이 한번 땅에 붙일세 없이 바쁘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바쁜 것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으면 편하게 누워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좀 쉬엄쉬엄 하지 그래." 하며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했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칼바람이 그대로 치고 들어오는 복도에 서서 보일러실안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 때문이다.



한참을 그러는 사이에 아랫집에서 고릴라(이것은 남편이 어떤 기준으로 정한 별명일 뿐이며, 그분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은 아닙니다.)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복도에서 헤드렌턴을 머리에 쓰고 열심히 보일러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다가 성난 고릴라가 남편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저 고릴라에게서 남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물이 세서 불편하시죠.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저희가 집에 오자마자 업체마다 전화를 했는데 와주겠다는 곳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알다시피 연휴이고 주말이라 그런가 봐요. 그래서 남편이 조치를 한다고 했는데 여기가 문제가 아닌가 봅니다. 주말이 지나는 대로 업체를 다시 꼭 불러서 처리해 드릴게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라가며 아저씨는 같은 말만 외쳤다.


"아니, 내가 다시는 물 안 세게 해달라고 했잖아요. 지금 당장 고쳐야지. 내려와서 한번 볼래요?! 빨리 고치라고 했잖아요!"


"아, 죄송해요. 저희도 빨리 고치고 싶은데 조금만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해? 이해고 뭐고. 내려와 볼래요? 물 안 세게 하라고 했잖아요."


고릴라는 복도가 떠나갈 만큼 큰소리로 으르렁댔다. 난감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 계속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싶었던 건지 고릴라는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도 아까 수도밸브를 열고 보일러를 켜는 바람에 다시 물이 세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했다.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도 알아서 하라는 말뿐이었다. 이럴 거면 관리비는 왜 받을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일단은 아랫집 아저씨가 저렇게 화가 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아랫집에 가서 상황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내려가봤자 뭐가 뭔지도 모를 테니 남편에게 내려가보라고 했다. 적어도 스티로폼에 의지해서 구조요청을 하는 상황은 아니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막상 남편이 아랫집에 내려가 보니 우리 집에서 내려간 물은 다용도실의 배관을 타고 한 방울씩 흐르는 정도였다. 물론 아랫집입장에서는 물이 세는 것 자체가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누수야말로 공동주택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고 그 또한 고의가 아니니 서로 조금 양보하고 다 고칠 때까지는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어야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아랫집은 막무가내였다. 기다려 달라는 말도 이해해 달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도배관의 밸브를 다시 잠갔다. 혹시 모르니 보일러의 전원도 꺼버렸다. 이제부터는 우리 집이 영안실이 되지 않기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전기매트의 전원을 켜두었고, 남편은 집 앞 편의점에서 6병씩 들어있는 생수를 2팩 사 왔다. 설거지를 못하니 저녁은 시켜 먹으면 되고 오늘만큼은 긴급한 상황이니 일회용 젓가락과 종이컵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엄마. 변기 물이 안 내려가는데?"


"오빠. 나도 쉬야 마려. 빨리 나와."


아 맞다. 수도를 잠그면 변기물이 내려가지 않는다. 큰일이다. 다른 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변기만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적어도 월요일까지는 그렇게 버텨야 했다. 남편은 보일러실에 가서 물병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보일러실의 수도밸브를 빼면 물병으로 바로 물을 받을 수 있는 모양이다. 복도에서 남편이 2L짜리 물병을 건네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서 변기에 붓고 다시 빈병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아무리 붓고 또 부어도 변기의 물은 쉽사리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유난히 많이 나오던 수도세의 원인이 변기물이었나 보다. 동시에 변기의 소중함을, 아니 물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대여섯 번은 부어야 겨우 물이 내려갔다. 힘들게 내리고 나니 첫째가 응가를 해버렸다. 그 위에 또 둘째가 응가를 했다. 나는 조용히 변기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병을 집어 들고 남편에게 전달을 했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갑자기 고릴라가 괘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자기도 아이 키우면서 너무한 거 아? 이 추위에 물도 없이.. 보일러도 못 켜고.. 너무하네 정말.. 다시는 내가 죄송하다고 하나 봐라.'


나는 그렇게 독을 품었다. 다시는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월요일까지는 버텨야 했다. 춥고 서글펐다. 먹고 싸고가 안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손도 마음대로 씻지 못하니 더 손이 씻고 싶어졌다. 이런 우리가 가여웠는지..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려주셨다. 그날밤 다행히 내일당장 와주겠다는 업체를 발견했다. 물론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원래의 금액보다 1.5배의 금액을 더 지불해야 했다. 급했다.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와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사실 고릴라가 조금 양해해 줬더라면 그 돈은 나갈 필요가 없는 돈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와 지인들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들은 모두 한결같았다.


"에이. 그 아저씨 뭐 바라고 그러는 거 아냐?"


설마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일아침이면 업체가 온다. 오늘밤만 잘 버티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너무 추웠다. 전기매트만으로 버티기엔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결국 남편은 보일러 전원을 켜두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아이들이 먼저였다. 다행히 보일러에서는 물이 세지 않는 모양이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도 고릴라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드르륵. 드르륵. 드르르르륵.'


다음날 아침, 경쾌한 소리가 온 집을 뒤흔들었다. 아이들은 무섭다며 안방에 꽁꽁 숨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변기와 수돗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 혹시 몰라서 관리실에도 전화를 해두었다. 일요일아침부터 드릴소리로 주민들을 불쾌하게 할 것 같아서이다. 아랫집에는 따로 알리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누수업체 사장님이 떠나신 다용도실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시멘트자국이 있었다. 거금을 주고 고친 거라고 하기에는 그 흔적이 너무 작았다. 어쨌든 고쳤으니까 된 거다.


'이봐요. 치사한 고릴라 아저씨. 다 고쳤다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물이 떨어진 아랫집 입장에서는 그 물을 닦느라 짜증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이렇게 모른 체하고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마음은 헤아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또 이렇게 착한 사람이고 싶어서 발버둥을 고 있었다.



씻지도 못한 초췌한 몰골로 남편과 집 앞 마트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칼바람이 귀를 자르고 코를 잘라갈 기세로 불어댔다. 밤새 얼어 죽지 않은 걸 감사해야 했고 동시에 괜히 나왔나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마트에서 선물세트 하나를 사서 아랫집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어제 물 닦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아뇨. 괜찮습니다. 물이야 셀 수도 있지요. 그나저나 날도 추운데 애들이랑 어떻게 보냈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고릴라가 밤새 까마귀고기를 삶아 드신 게 분명했다. 어이가 내 두 뺨을 마구 때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듯했지만 이제 와서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상냥한 사람처럼 웃으며 선물을 건네주고 뒤돌아 나와버렸다. 결국은 선물이었다. 그래서 그랬다는 게 확실해졌다. 백번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먼저 바나나부터 던져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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