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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y 04. 2023

내가 처음 만난 시각장애인 아저씨

매일밤, 잠들기 전에 자리에 누워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주로 끝말잇기와 같은 말로 하는 게임이나 어릴 때 이야기, 아이들 학교에서 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물론 아이들은 최대한 늦게 자기 위해서이고 나는 편하게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방법이라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게 한 시간 이상 지속이 되면 내 마음은 다급해지고 아이들은 더 말똥말똥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짜증이 섞인 애원으로 아이들을 재우고 만다. 끝은 비록 극단적이지만 시작은 늘 즐거운 것 같다. 어젯밤엔 횡단보도이야기가 나왔었다.


나 : "얘들아 횡단보도 바닥에 신호등 불빛이 들어오는 거 봤어? 얼마 전에 아빠랑 밤에 산책 갔다가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 옆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봤거든. 밤이라서 엄마눈에도 잘 보이더라. 신기하지?"


첫째 : "응. 엄마. 나도 봤어. 그런데 나는 아예 횡단보도에 있는 하얀 선들이 전부 신호등처럼 색깔이 바뀌면 좋겠더라. 그러면 더 잘 보일 거 아냐."


나 : "와. 맞네. 그러면 정말 확실히 잘 보이겠다. 대단한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신호등에서 소리도 안 났거든. 그땐 시각장애인들이 참 불편했겠다. 그렇지?"


첫째 : "아. 진짜? 많이 발전했네."


나 : "그렇지? 그런데 엄마는 있잖아. 얼마 전까진 신호등이 보였는데 그땐 그 음성안내 버튼도 보였거든. 그런데 신호등이 보이니까 그걸 굳이 누를 필요가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신호등도 안 보이고 그 버튼도 안 보여. 하하. 웃기지?"


첫째 : "아. 우리 엄마. 신호등 안 보여? 그래서 안 나오는 거야?"


내가 신호등이 안 보이는 걸 말해준 적이 없었던가. 아이가 안타까워하며 내 품에 안겼다.


나 : "응. 그런데 딱히 신호등 건너갈 일도 없어. 괜찮아. 물론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소리가 계속 나면 훨씬 편하긴 할 것 같아."


첫째 : "그냥 제일 좋은 거는 엄마눈을 고치는 건데.."


아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오히려 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 중학교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봄인지 여름인지는 모르겠지만 햇볕이 엄청 쨍쨍했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경찰관이 나에게 다가오시며 말씀하셨다.


"얘야, 여기 계신 아저씨가 시각장애인인데 네가 함께 건너줄 수 있겠니?"


"아. 네."


그러고 보니 옆에 계시던 아저씨의 손에는 흰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 처음이었다. 시각장애인을 바로 옆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런 사람을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저씨를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초록불이 켜졌고 나는 얼른 아저씨에게 초록불이라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아저씨의 팔을 잡아드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팔을 잡는 게 실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의 팔을 털썩 잡을 만큼의 용기도 없었고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결국 손을 아저씨의 팔에 살짝 데면서 함께 걸었다



생각보다 아저씨는 잘 걸어가셨다. 발걸음도 빠르고 씩씩하셔서 내가 오히려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다 건넜어요."


"고마워요. 학생."


소심했던 내 목소리와는 달리 아저씨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쩌렁쩌렁했다. 누군가를 도와줬다는 것이 내심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 아저씨도 나에게 무척 고마워할 것만 같았다.



그날의 그 아저씨는 큰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오신 게 분명했다. 왜냐면 그 당시만 해도 신호등에서 음성안내를 지원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횡단보도만 잘 건널 수 있다고 해서 나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 나에게 그 아저씨의 용기가 필요하다. 흰 지팡이를 들 용기와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갈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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