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함께 먹었던 지난날을 생각해 봅니다.
소풍 같은 은애 님에게
7일 중 4일을 소풍으로 보내다니! 그 누가 들어도 정말 부러운 한 주를 보냈네요, 은애 님. 네 번의 소풍 중 한 번을 제가 차지해서(?) 괜히 으쓱하기도 하고요!(웃음) 무엇보다 아이들이 엄마인 은애 님에게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 줬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확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어요. 소중한 이들에게 내 시간을 응원받는 기분이랄까요? 고맙고 든든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은애 님이 이야기해 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는 요새 2주도 채 남지 않은 장기 여행으로 인해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 덕분에 아직 휴가 전이지만 노느라 이미 일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일하는 것만큼 노는 걸 특히,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걸 무척 좋아하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관계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인가 봐요.
이번 편지에는 최근 일주일 간 사람들과 어울려 보낸 시간 중, 저희 집에서 열린 가옥축복식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해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최근 재계약을 하면서 신부님께 가옥축복식을 요청드렸어요. 말 그대로 제가 살고 있는 집이란 공간을 축복하는 자리였어요. 신부님은 재의 축복식에 가져오라고 나눠주셨던 야자잎으로 집안 곳곳에 성수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떤 장소를 축복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 이야기에 혼자 살아도 놀러 오는 손님이 많은 저희 집에 딱 맞는 축복의 시간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옥축복식은 토요일 오후에 진행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귀한 주말 시간이 비워 저희 집에 교회 식구들이 와주셨습니다. 축복식이 끝나고 다 함께 집 뒷산인 관악산 둘레길을 걸었고, 집 근처에 있는 인헌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 와 집에 있는 테라스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소풍 온 듯 식사를 했어요. 즐겁게 식사를 하다가 산모기의 습격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요! 하하!
그날 저희 집엔 어린이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는데요,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랍니다. 그 친구가 집 한 편에 마련한 제 작업실의 미술도구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에 도화지와 클레이를 꺼내주며 함께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식사를 마친 후,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제 냉장고에 붙어 있는 이 집을 다녀간 사람들이 써준 쪽지들을 훑어보시며 어린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영 님에게 편지를 써드릴까?"
어머니의 제안에 어린이 친구는 제 이름 '은영'을 어떻게 쓰는지 제게 긴밀하게 물어보더니, 금세 편지를 뚝딱 써서 보여줬습니다. 저는 그 편지에 적힌 단 한 장의 문장에 가슴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은영 님 밥을 가치 먹어서 조아요.
밥을 같이 먹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린이의 마음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날도 가옥축복식이라는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지만, 시간을 내어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풍성해지지 않았겠죠. 게다가 밥을 같이 먹어서 좋다니. 저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 저도 밥을 같이 먹어서 좋아요.
덩달아 은애 님과 함께 밥을 먹었던 순간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회사에서 이제 막 친해질 때,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서로 밥 약속을 자연스럽게 잡았던 거 같아요. 어쩌면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지가 친밀도의 척도인 것 같기도 해요. 서로 식성과 취향을 알아가는 그 시작점에 밥이 있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러고 보니, 제가 비건지향을 하는 탓에 은애 님이 항상 제게 맞추며 식사를 했네요. 문득 저는 은애 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애 님이 좋아하는 게 뭔지 궁금해요! 우리가 다음에 함께 할 밥 약속을 정할 때 알아두고 싶어요. (미소)
2024. 05. 24.
구름에 가려도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
은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