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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10. 2024

나뚜랄 나뚜랄

Day 7. 로스 아르꼬스 → 로그로뇨

로스 아르꼬스를 떠나며


새벽녘, 길을 나섰다. 나는 해가 뜨기 전 하늘에 드리워진 빛을 사랑한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보게 되는 이 하늘은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다. 이것은 무해하게 내 가슴을 콕 들이받고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나를 장악한다. 그 순간 나는 지워지고 만다. 현실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지속되려면 나라는 가장 현실적인 존재가 마땅히 지워져야 하는 법이다.


"해가 뜨려나 보다."


나를 현실이라는 위치로 되돌려 놓은 것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엄마의 말을 들으며 따듯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는 지금이라는 감각을 찾아갔다.


까미노에서 만난 첫 일출


하루에 이삼십 킬로미터씩 걸으며 산띠아고로 길은 길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태양은 늘 등 뒤에서 뜨기 마련이다. 뒤를 돌아보며 하늘을 노랗게 물이 들이는 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번 까미노에서는 처음 보는 일출이었다. 지난겨울에 걸었던 까미노와 다르게 이렇게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볼 수 있는 일출. 유럽의 겨울은 워낙 낮이 짧다 보니 매일같이 일출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여름은 마음먹어야만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일을 목격할 수 있다. 뭐, 몸이 알람시계처럼 새벽에 무리 없이 깨는 엄마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엄마와 내가 서로 닮은 점이 있다면 호기심이 많다는 점이다. 저 나무는 이름이 뭘까? 이건 뱀 구멍인가? 이 밭은 뭘 심어놓은 거지?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면 가던 길을 일단 멈췄다. 


"이거 오디 아니야?"


분명 문장은 물음표로 끝났는데 엄마는 답을 하는 대신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적당히 여문 것을 골라내느라 눈과 손은 분주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한 손 가득 오디를 차지했다. 그러더니 내 손에 오디를 고스란히 옮겨 담았고 다시 오디를 따기 시작했다. 엄마의 채집 활동을 지켜보며 나는 오디 하나를 입에 밀어 넣었다. 달큼한 향이 입안을 메웠다. 꽤 더운 날이어서 그랬을까? 오디의 작은 알알마다 터지는 물기가 더욱 시원하게 감겼다. 


길 위의 나뚜랄 간식


오디, 자두, 체리, 그리고 이름 모를 열매들까지……. 모녀는 먹음직하게 생기는 열매가 보이면 서로를 부르기 바빴다. 먹다가 탈이 나는 것이 아니냐며 어느 순례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새들이 쪼아 먹고 벌레가 꼬이는 이 열매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걷느라 지쳐있는 순례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벌겋게 내놓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나뚜랄(Natural, '자연의'의 스페인어) 간식을 기꺼이 즐겼다.




로그로뇨에 닿기 전 들린 마지막 마을인 비아나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28km 가까이 되는 긴 일정에 쉬어갈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긴 휴식시간 동안 굳어버린 다리를 가볍게 풀고 엄마는 스틱 삼아 쓰고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건 며칠 전 길에서 주은 나뚜랄 스틱이었다. 포장도로가 깔린 마을의 좁은 내리막 길을 엄마는 나뚜랄 스틱으로 짚어가며 걸었고 나를 그 뒤를 지켜보며 따라갔다. 그런데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비아나의 주민으로 보이는 짙은 푸른색의 작업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방금 자기가 나온 어느 건물의 마당으로 들어가더니 엄마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그러더니 마른 나뭇가지를 세워둔 벽으로 가 엄마에게 몇 개 쥐어주며 들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말 가볍다!"


엄마는 나뭇가지를 들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나도 건네받아 들어봤다. 확실히 엄마가 길에서 주운 것에 비해 가벼웠다. 마른나무가 이렇게 가볍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선뜻 내어준 그의 마음을 고이 받아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우리를 옅은 미소로 지켜보던 세뇰(Señol, 남성을 존칭 하여 부르는 스페인어)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 '정말 감사합니다'의 스페인어)


비아나의 어느 주민에게 받은 나뚜랄 스틱




지친 우리를 달래주는 젤라또의 달콤함

까미노에서 만나는 두 번째 대도시인 로그로뇨에 닿았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한나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무사히 걸어서 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긴 거리를 더운 날씨에 걸어온 탓에 엄마는 많이 지쳐있었다. 얼마 전부터 젤라또가 먹고 싶다고 하던 엄마의 말이 생각나 샤워로 땀을 씻어내고 함께 길을 나섰다. 


적당히 알아서 시키라는 엄마의 취향을 가늠해 나는 젤라또를 주문했다. 우리는 한 손에 젤라또를 들고 거리에서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를 찾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리가 건물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갈수록 속수무책으로 더위는 쫓겨났다. 빛에 가려지면서 힘을 상실한 일렁거리는 기운을 벤치에 앉아서 유심히 바라봤다. 유럽의 여름을 다루는 법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입 안에 가득한 젤라또는 더욱 차가웠다. 잇몸을 마비시키는 부드럽고 차가운 식감에 온몸 전체가 으슬으슬해졌다. 졸려오던 몸을 깨우듯 눈이 맑아졌다.


"우리 앞으로는 웬만하면 알베르게에서 묵자. 숙소 값 아낀 걸로 이런 거나 더 사 먹게."


엄마는 점차 이 길에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 탓에 나는 이번에도 개인실이 있는 펜션을 골라 예약을 한 터였다. 자꾸 자기 때문에 돈을 더 쓰게 되는 것이 여간 불편했는지 엄마는 이제 알베르게를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래, 엄마가 기운을 차리는 방법이 꼭 숙소에만 있는 건 아니겠지. 젤라또라면 나도 대환영이니까. 나는 콘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젤라또를 얼른 베어 물어 말했다.


"부에노!"(Bueno, '좋다'의 스페인어)



Day 7. JUN 16, 2024

Los Arcos → Logroño, 27.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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