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로그로뇨 → 나헤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이제 막 로그로뇨에서 벗어나 그라헤라 저수지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슬며시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12년 전, 여기에서 목격한 구름을 이 저수지와 한시도 떨어뜨려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길게 쭉 찢어 둔 솜사탕 같은 구름이었다. 지평선 아래에서 태동 중인 태양의 여린 빛을 받아 구름은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친구가 찢어준 솜사탕을 건네받듯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손에 잡힐 리 없는 구름은 가볍게 달아나고 말았다. 나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야 한다는 순례자의 규칙을 잊은 채 구름의 뒤를 쫓아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라헤라 저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의 지혜가 순환하며 태어난 구름은 찰나를 살다 떠나고 만다. 그러니 다시 만날 수 없음에 체념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저수지를 고요히 유영하는 작은 새들을 바라봤다. 세대를 거듭해 이곳에 터전을 잡았을 이 생명들에게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을 아는지 묻고 싶었다. 그들이 물려받아 몸에 새겨진 정보 어딘가에 솜사탕 같이 길게 쭉 늘어진 구름의 이미지가 있는지. 그러나, 도무지 새의 언어는 알 길은 없었다. 그 어떤 낯선 언어에도 기죽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화를 여는 나라도 말이다.
잠시 쉬어갈 생각으로 들린 나바레떼의 바에서 어느 네덜란드 부부를 만났다.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묻다가 한국에서 왔다는 내 말에 왜 까미노에 한국인이 많은지 이유를 물었다.
"아마 시간이 필요해서일 거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 일상을 떠나 걷기만 하는 시간이."
나를 향한 개인적인 물음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내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회의 인상과 연결 짓게 된다. 매일 아침, 출근 버스에서 마주했던 버석한 얼굴들을 기억하며 말이다. 윤택하게 가꿔나갈 삶이 아닌 생존에 가까운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의 걸음은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나 입이 바싹 말라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퇴직을 단 며칠 남겨둔 어느 날이었다. 동료이지만 같은 회사에서 10년의 세월을 먼저 통과한 선배의 말이었다.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선배는 회사에서 자신의 쓰임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경쟁을 원하지 않지만 자꾸만 스스로 내세우지 않으면 도태되는 체계에 지쳐있었다. 일을 즐겁게 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 조직은 눈앞에 성과만 바라고 있으니 자꾸 엇박자가 났다. 불협화음 가운데 음이탈을 내며 떠나는 내게 전한 선배의 솔직한 마음은 서로를 눈물짓게 했다.
그러나, 이 마저도 너무나 개인적인 답인지도 모른다. 사회 도처에 깔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긴 비행시간을 감수하고 스페인까지 와서 까미노를 걷는다는 이유는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사회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니 말이다.
이 길에 유독 한국인이 많다 보니 내게 '한국인'에 한정해 질문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수가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앞선 답이 유효할지 모르지만, 한국인이 이 길을 찾는 이유는 다른 국적의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이 길의 본래 목적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800km라는 긴 여정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최근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매력으로, 마침 긴 휴가를 보낼 기회가 생겨서, 그저 자연을 곁에 두고 걷는 것이 좋아서, 다이어트가 된다는 말에 혹하는 마음에……. 이처럼 개인의 맥락에 따라 이유는 여러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알아갈 때, 질문을 하기보다 그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을 때까지 관계가 어느 정도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나는 여태 그 많은 한국인들을 까미노에서 만나면서도 이곳에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 비해 질문이 적은 나는 무겁지 않은 노력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브라이언처럼.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린 바에서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던 브라이언을 만났고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같이 걸었다. 브라이언은 어김없이 내게 질문을 건넸다. 이번에 그가 관심이 있어하는 주제는 메세따에 관한 것이었다. 적막한 고원 지대의 메세따에 진입하려면 아직 며칠이 남아있는데도 아무것도 없이 길게 쭉 길만 나 있는 그곳이 브라이언은 벌써 궁금했나 보다. 그는 그곳을 걸었던 내 경험에 대해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어서 지루하다며 건너뛰기도 한다는데 넌 어땠어?"
"응, 맞아.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야. 심지어 마을이 한동안 없는 구간도 있고. 그런데, 난 메세따가 좋아. 그 장소를 좋아한다기보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좋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건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눈 대화야. 사실, 너무 예전일이라 세세하게 메세따의 풍광을 기억하지 못해. 가끔은 내가 정말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 겨우 기억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하지만 함께 걸었던 사람은 누구였고, 그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고, 내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생생히 기억해. 내가 저번에 말한 라이자 기억하지? 라이자도 메세따에서 만났어. 메세따는 평지라서 걸으며 대화하기에 제격이거든. 지금처럼 오르내림이 없으니 말하는데 숨이 가쁘지도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너라면 메세따를 좋아할 거야."
28km가 조금 넘는 긴 여정에 도전한 날이었다. 도전이라고 칭한 이유는 내가 두 번에 나눠서 걷자고 엄마에게 제안을 했던 구간을 하루 만에 걸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잠시 고민하며 지형을 보더니 나헤라까지 걸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반갑게 엄마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대신 이번에도 짐을 부치는 것으로 난이도를 낮췄다.
매번 하던 대로 내 큰 배낭에 무거운 짐을 옮겨 담아 부쳤고, 나는 그에 비해 작고 가벼운 엄마의 배낭을 멨다. 그러나, 엄마의 배낭이 내게 잘 맞지 않는지 배낭에 거친 면이 목과 어깨에 닿는 바람에 피부가 계속 긁혀 곤란했다. 배낭을 이렇게도 메보고 저렇게도 메 봤지만 피부가 붉게 부어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엄마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배낭을 메겠다고 자처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 수 km를 나 대신 엄마가 배낭을 지게 되었다. 더위가 며칠간 이어지는 날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엄마는 묵묵히 배낭을 메고 걸었다.
브라이언은 까미노 일정의 초기에 무척 고생하는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진정한' 순례자라며 치켜세워줬다.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지만 우리 모녀는 오히려 그 무게 있는 위로에 크게 웃었다. 덕분에 걷기가 고단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진정한' 순례자라며 격려를 하게 되었다. 그 말 한 마디면 지쳐 있다가도 웃으며 기분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돌보며 미리 예약해 둔 나헤라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놀란 것은 우리가 그 알베르게의 첫 손님이라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겨우 한 시였다. 너무 잘 걸은 거 아니야? 사실, 엄마는 힘들다 힘들다 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정말 잘 걷는 축에 속하는 순례자였다. 무려 12년 전의 나보다 훨씬!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들이 말이야, 목주름 생기면 그거 가리려고 목 위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는데……."
나헤라를 가로지르는 냇가를 따라 걸을 때였다. 엄마는 까미노를 걸으며 본 유럽의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내 몸이 변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입고 싶은 옷을 입는 사람들을. 가슴이 푹 파진 옷, 무릎을 덮지 않고 위로 올라간 짧은 치마에 엄마는 놀란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는 말했다. 뭐든 내가 원하는 걸 입어도 되겠다고 말이다.
산띠아고 순례가 끝나면 엄마와 예쁜 원피스를 사 입으러 가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선명하고 밝은 색상의 옷으로.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관하지 않고서.
Day 8. JUN 17, 2024
Logroño → Nájera, 28.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