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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12. 2024

엄마라는 집과 함께

Day 9. 나헤라 →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나헤라를 벗어나며 Daughtry의 〈Home〉을 '다시' 들었다. 12년 전 이 길을 걸었던 은영의 기록을 살펴보다가 그때의 내가 이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에게 집은 밖에서 맞고 온 비를 말리기 어려운 그늘진 곳이었다. 창문은커녕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문도 없는 듯한 공간에서 눅눅하게 젖어든 마음을 뒤적이다 잠에 들기 일쑤였다. 목 놓아 우는 고양이를 달래는 꿈에서 깨어나면 나라는 책은 곰팡이가 쓴 채로 어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다음 장을 넘겨 나는 글을 써 내려갔다. 주인을 닮아 잔뜩 울어 난 종이에 흑연의 자취를 거칠게 남겼다.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에서 졸졸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범람하려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내 연필 끝이 부러졌고 어긋난 문장을 수정하기 위해 지우개질을 했다. 그러나, 물기를 먹은 종이는 가벼운 지우개질에도 금세 찢어지고 말았다. 주저앉은 천장에 빛이 들지 않아 종이를 말릴 방법이 없었다. 결국 울음은 흘러넘쳤다. 다시 눈물에 젖은 몸을 말려야 했지만 집은 빛이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내게 집이 아니었던 곳인 집을 나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찾아오는 길

집을 떠나기 위해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집을 떠나는 것만이 물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몸을 말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옷가지를 배낭에 걸어두고 걸으면 금세 마른다는 사실처럼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인, 그래서 나를 배신하지 않는 진리가 필요했다. 거리로 나섰고 해가 드는 방향을 살피며 바람이 이는 곳에 나를 살며시 흔들어 펼쳐 놓았다. 걸음마다 자국을 남기던 쾨쾨한 물기는 점차 말라갔다. 이젠 지우개질을 해도 부스러기만 남을 뿐 더는 종이가 찢어지지 않았다.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기까지 기분 좋은 건조함이 들었을 때서야 마침내 나는 비가 두렵지 않았다.


까미노를 마치고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빛이든 바람이든 드나들 수 있도록 창문을 내고, 바닥에 축축하게 물이 고여있지 않도록 수로를 내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기를 말리는 법을 조금은 터득한 것인 양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라는 존재를 지우는 것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며 떠났던 나는 사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위에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나의 집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고. 나는 걸음을 재촉해 앞서 걷는 집을 따라갔다.


나의 집이 찍어준 길 위의 나




둘 다 각자의 배낭을 메고 20km를 조금 넘는 거리를 가뿐히 걸어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 도착했다. 지난밤 머물렀던 나헤라의 알베르게에서 만난 오스삐딸레로는 요새 길에 순례자가 많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그는 세 가지의 까닭을 댔다. 먼저 6월부터 더워지는 탓에 사람들이 찾지 않고, 다음으로 곧 있을 대학 입학시험으로 학생들이 길에 많지 않고, 마지막으로 축구리그가 열리고 있어 다들 그걸 챙겨보느라 걸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 다 유럽을 기준으로 든 근거였지만 그 누구보다 이 길 위에는 유럽인들이 많다 보니 충분히 적용가능한 이유였다.


신뢰할 수 있는 그의 말에 우리도 더 이상 예약은 하지 않고 다니기로 했다. 길 위에 내가 혼자 있는 거라면 진작 예약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다녔겠지만 엄마가 있으니 매일 밤 피로한 몸을 가눌 수 있는 침대를 꼭 확보해야만 했다. 그것도 무조건 아래층 침대로!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의 수가 많지 않았고 예약을 하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엄마는 내가 일을 줄이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걷기의 일과를 마치면 다음 날 가야 할 마을의 알베르게를 찾아보고 예약을 하느라 나는 매일 밤 정신이 없었다. 엄마의 말처럼 신경 쓸 일이 하나만 줄었는데도 넉넉한 여유가 생겼다.


예약 없이 찾아간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알베르게는 지난번에도 묵었던 곳이었다. 공용공간에 자리한 검은색 소파가 눈에 익었다. 아래로 깊게 꺼지는 소파에 앉아 함께 걷던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체크인을 하려고 서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 다가와서는 들고 있던 흰색 비닐봉지에서 붉게 익은 체리를 한주먹 꺼내 내 손으로 옮겨 주었다. 그들은 알베르게의 오스삐딸레로가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순례길 위에 있는 마을에서 만나 볼 수 있는 환대였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알베르게에서 받은 환대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손빨래를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엄마는 휴식 모드가 된다. 나는 그때마다 하릴없이 알베르게 밖을 나와 동네를 거닐었다.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이.


산책길에 미국에서 온 한국인 네이튼 아저씨를 만났다.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정착하신 아저씨는 이 길을 아들인 이든과 함께 걷고 있었다. 피레네를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첫날부터 서로 안면을 튼 사이이지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엄마의 안부를 묻던 아저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잘한 일이라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감사하다고 답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면 좋았을 텐데 나는 별안간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도 내가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내 옆에 있어야 할 엄마가 보이지 않는 걸 염려해 엄마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들에게 엄마는 시에스따(Siesta, 스페인 등 열대 지방의 낮잠 자는 시간을 뜻하는 스페인어)를 즐기는 중이라고 웃으며 받아칠 수 있던 것을 아저씨 앞에서는 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 묻는 엄마의 안부는 나를 눈물짓게 했다. 괜히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지난 며칠간 밤마다 울면서 지냈다고 털어놓았다. 엄마를 고생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아저씨는 엄마의 나이를 묻더니 내 대답에 아직 젊으신데요! 뭘, 하며 말을 이어갔다.


"잘하고 계신 거예요. 산띠아고를 완주하고 나면 오히려 어머니께서는 더 건강해지실 거예요. 정말이에요."


엄마를 위해 온 곳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은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미 본래의 목적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정 끝에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아직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도달해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선명하지 않다며 스스로 부추기며 내 몰았다. 


한편으로 그래도 잘하고 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네이튼 아저씨의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황급히 대화를 주워 담으며 자리를 떴다. 여태 참아온 갈증을 채워주는 아저씨의 위로를 자꾸만 듣고 싶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 말들에 기대다 보면 엄마를 힘들게 하는 나라는 존재를 쉽게 용서하게 될까 봐 거리를 둬야 했다. 나는 멈출 수 없는 자책에 중독되어 있었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오후


알베르게 뒤편의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 주변에 식당이 없는 터라 덕분에 얼굴을 아는 순례자를 마주칠 일 없이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을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노래가 듣고 싶었다. 음악 앱에 들어가니 아침에 들은 〈Home〉의 앨범 재킷이 보였다. 이 역시 너무 눈물이 나는 노래인가 싶어 다운을 받아 둔 노래를 아무거나 틀었다. Japaness Breakfast의 〈The Woman That Loves You〉였다. 아, 그도 엄마를 노래한 사람이지.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 미셸 자우너는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쓴 책 『H마트에서 울다』로 우리나라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89년생 미셸들은 왜 다 이러나 몰라. 나는 동갑내기 미셸을 괜히 탓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위로가 되는 노래에 마음을 뉘이면서. 여전히 눈물은 흐르고 있었고 그 때문에 눈물 자국은 사선으로 나고 있었다.



Day 9. JUN 18, 2024

Ná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20.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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