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 벨로라도
12년 전, 까미노를 다녀온 이후로 내 여행은 이른 아침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행에 별다른 취향이랄 게 없던 시절에 떠났던 까미노. 나는 매일 주어진 거리를 성실히 걷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겨울이었을 뿐이었다. 해가 짧다 보니 일찍 길을 나서야 했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걷기를 시작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일출을 보는 일은 당연했다.
저평선 너머에서 빛이 가늘게 새어 나오며 곤히 자고 있는 지상의 것들을 깨우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순례자가 수행하는 하루의 첫 일과였다. 대지는 본연의 색을 드러내며 고유의 목소리를 찾아갔다. 나는 눈이 부신 그 순간을 똑바로 보고 싶었다. 눈이 타들어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아침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태양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세상을 비춰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 후로 어디든 여행을 떠나게 되면 일출을 쫓아다녔다.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보는 태양의 인상은 매번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전해지는 마음은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한없이 포근한 품을 내어주는 마음을 닮고 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태양의 이름을 가진다면 가능할까?
어린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나는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기억한다. 오롯이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자란 나는 내 이름의 성이 '이'가 아닌 '최'라는 것에 늘 물음표를 품고 있었다. 내 이름 석자의 '최'는 옅게 자리한 아버지의 존재를 간신히 이어 주는 단서에 불과했다.
"네 이름은 내가 짓고 싶었어."
몇 해 전, 엄마의 성을 쓰고 싶다는 내 말에 엄마는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나는 성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 거였는데 난데없이 엄마가 이름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당황했다. 은영이라는 내 이름을 삼촌이 지은 거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낳게 될 첫 아이의 이름을 짓고 싶었던 엄마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연은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엄마가 붙여주고 싶었던 내 이름은 뭐였어?"
"몰라, 기억도 안 나."
엄마는 실망감에 나에게 주려고 했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런 탓에 내가 불릴 뻔한 이름을 나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잃어버린, 이해하기 어려운 상실감이 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이름도 함께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이름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편이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름이 같은 최은영이라는 친구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나만이 지닐 수 있는 개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이름 같아서였을까?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자음 'ㅇ'이 유난히 많은 내 이름을 발음을 하고 나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약한 구석을 들키는 것 같아서였을까? 그보다 은영이라는 이름 대신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이 많았던 나는 공적인 서류를 작성할 때서야 '최은영'이라는 이름을 마주하곤 했다. 누군가 나를 최은영, 은영아, 은영 님, 은영 씨라고 부른다는 것은 곧 그가 나와 친밀하지 않다는 증거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른 중반이 되도록 이름 하나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대체 뭐람. 내 이름은 불릴 때마다 항상 나를 비껴가는 낯섦만 남곤 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인 줄도 모른다. 이 이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임을. 나는 그렇게 내 이름 석자 최은영을 밀어냈다.
여러 가지 후보를 두고 엄마와 논의 끝에 결정된 이름은 '해나'였다. 엄마는 그게 꼭 염색약을 말하는 것 같다며 별로라고 했지만 이름을 쓸 당사자의 마음은 해나에게 기울었다. 해나는 내가 까미노를 통해 사랑하게 된 일출 즉, '해가 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기 때문이다.
탐탁지 않아 하던 엄마는 늘 그랬던 것처럼 끝내 동의했다. 우리 모녀의 의사결정 방식은 항상 그랬다. 자신의 일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당사자가 결정권을 갖고 다른 한쪽은 별 수 없다며 동의해 주는 방식. 이번 안건은 나와 관련된 것이니 내가 결정을 했고, 엄마의 어쩔 수 없는 합의 과정을 거쳐 가결됐다. 그렇게 나는 비공식적으로나마 '이해나'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이해나라는 이름을 지닌 채 까미노에 돌아온 최은영은 지난한 어둠의 끝에 빛을 내려주는 일출을 바라봤다. 앞서가는 엄마가 멀어지는 것에 마음이 동요했지만 그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저 이 순간에만 머물다 갈 시간에 집중해 길게 쓰기로 한 것이다. 멈춰 서서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나를 열어놓았다. 동경하는 대상의 이름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그를 닮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나는 그저 눈을 감기로 했다.
"정말 멋지지 않아?"
가늘게 이는 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내 뒤에서 브라이언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를 떠나 처음으로 만난 마을인 그라뇽을 엄마와 나는 지나치기로 했다. 엄마는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쉬는 것보다 그것에 몰두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엄마에게 걷기는 순례자의 일이었기에 쉼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는 최대한 걸을 수 있을 만큼 쭉 걸은 후에 쉬거나 목적지로 둔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쉬어야 안심했다. 알베르게의 체크인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는 수가 생기더라도 엄마는 차라리 얼른 그 마을에 가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하며 빨리 해치우고 마는 심정으로 걷기를 대했다. 하루에 적게는 다섯 시간을 많게는 일곱 시간까지 걷는 고된 일과이다 보니 충분히 쉬어가면 좋을 텐데 엄마의 속도는 서두르는 것에 익숙했다.
엄마가 사는 일상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밥을 다 먹고 수저를 놓으면 동생들이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바로 할 일을 찾아 식탁을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엄마가 느슨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좀처럼 접어두질 못했다.
변화를 바라는 어리석음은 엄마를 향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엄마가 아침에 좋아하는 커피라도 마시면서 숨을 고르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 욕심인줄 알면서도 자꾸 엄마에게 권하곤 했다. 엄마는 오래 쉬면 오히려 다리가 굳는 것 같다며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럼 스트레칭을 충분히 하고 걸으면 되지 않겠냐고 나는 되받아쳤다. 몸을 무리하게 써야 하는 까미노에선 스트레칭은 필수이니까, 라며 근거까지 대면서. 그러나, 엄마는 서유석의 노래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를 부르며 내 입을 꼭 다물게 했다. 늙어버린 몸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노래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쉼 없이 걷는 엄마의 재촉이 반가웠다. 다음에 도달한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이슈트반을 만났기 때문이다. 헝가리에서 온 그를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로 가는 길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몰타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1년 반을 몰타에서 산 그에 비하면 나의 100일은 애교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반가울만한 일이었다. 다른 공통점을 더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대화는 날이 갈수록 밀도가 높아졌다.
주로 공립 알베르게 위주로 머무는 이슈트반을 지난밤 머문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보지 못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건가 예고 없는 이별에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라뇽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그의 말에 나는 지난밤에 보지 못한 또 다른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 미국에서 온 모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 던을 말하는 거야? 와이오밍 주에서 온 던? 어젯밤에 던도 그라뇽에 있었어!"
우리가 목적지로 둔 벨로라도보다 더 먼 비야쁘랑까 몬떼스 데 오까까지 걸어갈 거라는 이슈트반에게 그곳에서도 던을 만나게 된다면 연락처를 물어봐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계속해서 앞서 걸을 계획인 이슈트반의 연락처 역시 받아두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앞으로 길에서 만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다시 보는 건 어렵더라도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언젠가 그를 만날 기회가 찾아오겠지, 하며 내 마음을 달랬다.
웃긴 이야기이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누군가에게 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아닌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이니까. 게다가 엄마의 보호자라는 신분으로 머나먼 땅인 스페인에 있다. 엄마를 돌보는 일이 우선이 되어 나를 챙기는 것도 버거웠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신경 쓸 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일상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르게 여행지에 있을 때 유난히 경계가 허물어져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가 바로 나란 사람이다. 그런 나를 두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 원은 '피리를 부는 누님'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준 적이 있었다. 사실, 악기를 다루는데 영 재주가 없는 내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서툰 연주에도 몸을 흔들며 다가와준 이들 덕분이다. 그러니 까미노에서도 제 아무리 다짐을 한다한들 다가오는 사람을 피할 순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내 마음을 모른 채 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만나 친구가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친구로 여기는데 기준이라도 되는 것인 양 연락처를 절대 교환하지 않으리라 했던 결심을 한 것도 이미 며칠 전에 무너진 참이었다. 그 첫 번째를 차지한 건 역시나 브라이언이었다. 이제는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하는데 다짐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 원래 다짐이란 건 무너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슈트반의 연락처를 받고서 그가 전해줄 던의 연락처가 기다려졌다.
"네 어머니, 정말 잘 걸으신다. 우리 엄마는 절대 못할 일이야. 그리고 너도 대단해. 어떻게 엄마랑 올 생각을 했어?"
이슈트반은 엄마와 자신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었다. 덧붙여 엄마와 나처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우린 그럴만한 사이란 걸까?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우리가 돈독해 보인다는 말을 받은 그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그런 듯하면서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 함께 오게 된 전제 조건이 그런 것이라면 더욱이 동의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곳을 엄마와 함께 오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언제부턴가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이야기에도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엄마는 내가 다니는 여행지를 유심히 살펴보며 그때마다 말했다.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까미노는 그중 하나였다. 엄마에게는 종교가 있었고 다른 여행지보다도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이모들 사이에서도 까미노는 종종 등장하는 대화의 주제였다. 엄마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이곳을 함께 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의 나이 듦에는 나의 책임이 있으니 엄마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한 자식 된 도리라고. 우리가 이곳에 함께 온 이유는 모녀 사이의 순수한 돈독함이 아니라 내가 지닌 책임감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림을 상상한 것과 다르게 책임감으로 시작된 여행은 죄책감으로 물들어갔다. 엄마의 걸음에 들러붙은 고통 역시 나 때문이었으니까.
"어머니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나 역시 부모님이 나를 키우며 자신을 포기한 것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는 새로운 가정에서 찾아올 수 있다고 봐. 태어날 자녀에게 말이야."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이슈트반이 말했다. 결혼이나 자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자신이 없어지는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건 나와 너무나 거리가 있는 삶이다. 내게는 아이가 없는 삶이 더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때 갚아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뒤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슈트반과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걷던 길의 건널 목에 바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긴 달음박질 끝에 엄마는 그곳에서 쉬어갈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이슈트반은 계속 걸어가겠다고 했다. 이 여정에서 만난 인연 중에서 처음으로 맞는 작별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허그를 했다. 이 헤어짐에는 가볍게 흔드는 손 인사는 적절하지 않으니까.
벨로라도에 도착한 엄마와 나는 늦은 오후 장을 보러 슈퍼마켓을 가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낯이 익은 미국의 뉴욕에서 온 순례자 메리를 만났다. 길을 걷는 중에 종종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존재가 확실히 각인된 것은 나헤라에서였다.
나헤라의 알베르게에서 낮잠을 자는 엄마 옆에서 요가를 하고 있을 때,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방을 내다보니 이제 막 도착한 잉이 눈물로 얼룩진 메리와 함께 있었다. 샌들을 신으며 걷다가 발이 망가져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된 메리에게 잉이 스틱을 빌려주며 가까스로 같이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잉이 베풀어준 마음을 치켜세우는 대화에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나는 잉이 준 약으로 엄마가 알레르기로 더는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늘어놓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잉을 가리켜 캐내디언 에인젤이라며 입을 모았다.
“발은 어때? 오늘은 어떻게 왔어?”
“여기까지 버스를 탔어. 조만간 신발도 새로 사려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은영.”
완급조절을 잘하고 있는 메리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 참, 메리라면 지난밤 보지 못한 잉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이슈트반과 던에 이어 잉 역시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조바심이 나게 한 인물이었다.
“아, 응! 잉은 오늘 비야쁘랑까 몬데스 데 오까를 간다고 했어. 혹시 잉의 연락처가 필요하니?”
장을 보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메리에게 받은 잉의 연락처로 메시지를 보냈다. 기대어 선 벽에 난 창문에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날까지 비 소식을 알리는 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보로 추측할 수 없는 내일이기도 했다. 어떤 길을 걷고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내일이 우리에게 올 테니까.
Day 10. JUN 19, 2024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Belorado, 22.7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