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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15. 2024

슬픔을 위로하는 보름달

Day 12. 산 후안 데 오르떼가 → 부르고스

하루를 여는 새벽

새벽 5시 40분. 엄마와 나는 해드렌턴 대신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고 어둠 속에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같은 마을에 묵은 순례자들이 앞뒤로 있어 숲길도 안전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한 시간가량을 걷고 나니 언덕 아래로 아헤스 마을이 보였다.


"봐, 아침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나설 채비를 마친 채 아헤스의 알베르게 앞에 서 있는 브라이언을 만났다. 아침 식사할 만한 곳이 모두 문을 닫았다며 일단 계속 걸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엄마와 나도 배낭에 챙겨놓은 간식으로 허기를 대강 추리기로 했다.


"생장 피드 포르에서 비슷한 속도로 걸어왔던 순례자들이 부르고스 이후에는 흩어진다고 하더라고."

"응, 맞아. 부르고스가 꽤 큰 도시라 2박을 하며 체력을 조절하는 사람들도 많지. 그리고 부르고스 이후로 걷게 될 평탄한 지형의 메세따를 추천 거리보다 더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어. 메세따가 지루하다며 아예 건너뛰는 사람들도 있고. 아참, 부르고스에서 순례를 마치는 사람들도 꽤 많아. 다음에 와서 이어 걷기도 하니까. 혹은 부르고스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이들도 많고. 아마 앞으로 새로운 얼굴들을 보게 될 거야."

"넌 어때? 부르고스 이후에 어떻게 걸을지 계획을 세웠어?"

"엄마가 쉬어가면 좋을 거 같아서 2박을 하려고 했는데 그냥 걷자고 하셔서 다음날 바로 이어 걸을 거 같아."

"나도 바로 이어서 걸으려고. 우리 내일도 볼 수 있겠다."

"응. 그런데 엄마의 다리 상태를 확인하면서 다음 일정을 정해야 할 거 같아. 너는 워낙 잘 걸으니까, 우리보다 멀리 걸어갈 수 있을 테고. 당장 내일도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계획이란 걸 세워두면 엄마가 자신을 밀어붙이며 걷게 될까 봐 나는 조심스러웠다. 매일 밤마다 엄마를 살펴보며 다음 걸어갈 거리를 정하는 편이 나았다. 브라이언처럼 곁을 내준 친구와 함께 걷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말인데, 이따가 엄마랑 셋이서 같이 사진 찍을래? 언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내 말을 듣자마자 브라이언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사진을 부탁할 모양이었다. 때마침 사파리 재킷을 입은 순례자가 우리를 지나쳤다. 두리번거리는 브라이언을 본 그는 먼저 나서서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스마트폰을 건넸다.


부르고스로 가는 길


사진을 찍어준 그에게 브라이언이 이름을 물었고 그는 자신이 스티븐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브라이언이 하는 자기소개를 이어받아 엄마와 나도 이름을 말했다.


"은영, 혹시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에서요."

"아, 당신들이로군요. 한국에서 온 모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정말 유쾌한(Delightful) 사람들이라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왜…? 멋쩍게 웃는 내게 브라이언이 말했다.


"말했잖아. 네 엄마랑 너, 까미노에서 유명인사라고."

"유명 인사는 너이겠지. 어제 너랑 점심 먹을 때 모두 너한테 인사를 하던데? 셀레브리티 브라이언!"


스티븐의 말에 왜인지 나보다 더 신이 난 브라이언에게 나는 사실을 정정해 줬다.




문을 연 식당을 찾을 수 없는 작은 마을을 계속 지나치며 허기에 점차 지쳐가던 중 마침내 식사할 곳을 발견했다. 배를 주린 이들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거리의 순례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멈춰 배낭을 내려놓고 음식을 주문하고 목을 축였다.


"던!"


나는 맞은편에 앉은 브라이언의 뒤에서 발견한 낯익은 얼굴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옆에 있던 엄마도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며칠 전 이슈트반이 전해준 던의 연락처로 나는 그와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앞서 걷던 던은 같은 날 부르고스에 닿을 것 같다며 그곳에서 만나자고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말대로 부르고스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던도 식사할 곳을 찾아 여기에서 머물게 된 모양이었다.


던은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멨던 배낭을 다시 풀고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그리곤 우리의 안부를 물었다. 무엇보다 던은 엄마의 다리를 가리키며 요즘 어떤지 물었다. 엄마는 알레르기도 다 나아서 걷기 훨씬 좋아졌다고 답했다.


"걸음이 느려서 먼저 걷고 있을게. 이따가 봐요."


아들 도스의 전화를 받던 던은 그가 일러준 대로 길을 걷고 있겠다며 나섰다. 먹는 속도가 느린 나도 마저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걸을 채비를 마쳤다. 브라이언은 배낭 정리를 해야 한다며 따라잡을 테니 먼저 걷고 있으라고 했다.


길에서 만난 고양이 가족

엄마와 걷던 나는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다시 되돌아오는 던을 발견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으니 식당에 스틱을 두고 왔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둘 다 이를 어째, 하며 우리가 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던은 걷다가 한 번 더 멈춰 섰는데 우리를 뒤따라 오던 브라이언이 그의 앞에 있었다. 던에게 브라이언이 나와 같은 질문을 하는 듯했다. 대화가 꽤 길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했지만, 엄마가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부르고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예상과 다르게 던과 도스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브라이언이 던에게 자신의 스틱을 빌려줬다고 했다. 던의 스틱을 브라이언이 찾으러 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자신은 패스트 워커라 금방 다녀올 수 있다고 던을 안심시켰지만 브라이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는 던에게 나는 브라이언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문제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브라이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던을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 걷기 바빠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 했는데……. 이따 브라이언 오면 마음 쓰는 게 훌륭하다고 이야기해 줘야겠다."

"남을 돕는 것도 내가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거니까. 브라이언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자처한 걸 거야. 이따 오면 반겨주자."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언제 왔는지 브라이언이 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던도 이미 만났다고. 밝은 그의 표정을 따라 웃었다.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부르고스 대성당


"내가 마음이 맞지 않는 너랑 왜 여기까지 왔는지 후회가 된다."


사건의 발달은 부르고스에 있는 유일한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 여행을 함께 온 것에 대한 후회로 엄마의 마음이 번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문장은 이 문제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처럼 들렸다. 또 내가 뭔가 잘못을 한 걸까? 나는 해명하고 싶었다.


엄마는 입맛에 맞지 않는 유럽 음식에 지쳐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친구 문은 어머니랑 가면 좋을 거라고 부르고스에 있는 한식당 정보를 알려줬다. 며칠 전부터 엄마는 한식당에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캄캄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도 점심시간에 맞춰 한식당을 가겠다는 의지가 한 몫했다. 그런데 알베르게에서 십 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한식당에는 우리가 앉아서 식사할 자리가 없었다. 이따 저녁에 오면 식사가 가능하다고 주인은 일러줬지만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기 싫어하는 엄마에게 왕복 이십 분 이상의 거리를 다시 걷는다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크게 실망을 한 엄마는 네 친구가 예약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면 좋았을 걸! 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커지는 엄마의 감정을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엄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친구 탓이 아니잖아. 그냥 상황이 그런 건데 기분 풀어."


그러나, 이 말은 엄마의 화를 돋우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뿐이 아니라 눈물을 보이면서 나를 원망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눈앞에 있지도 않은 친구의 편을 든다며 속상해하는 엄마는 내 손을 뿌리치며 신경질을 냈다. 친구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고 설명했지만 섭섭한 엄마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딸인 내가 엄마의 감정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 내 오만이었을까.


"너랑 매번 이렇게 틀어지는 걸 알면서도 내가 너를 따라나서다니."


언젠가부터 엄마는 나와 사소한 다툼에도 크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과거의 일을 끌고 오는 것은 엄마가 내게 화를 표출하는 패턴 중 하나였다. 눈앞에 있는 일을 가지고 다투는 것도 고달픈데 지나간 일을 모두 소환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 역시 무력했던 과거로 돌아가곤 했다. 집이 싫어서 떠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눈물이 났다. 딜라이트풀은 무슨, 딜라이트풀. 사람들은 모른다. 겉으로만 보면 알 수 없는 복잡한 맥락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걸.


사정없이 쏘아붙이는 엄마의 말에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 길을 걸으며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엄마라고.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말하기보다 화를 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며 털어버렸으면 해서 그런 거였다고. 사실, 보통 여행도 아니고 순례길인데 엄마의 마음 같지 않은 일은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그때마다 이럴 수 없으니까 그런 거라고. 그럼에도 엄마가 화난 이유가 내게 있다면 사과하고 싶다고. 엄마의 실망한 마음을 먼저 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건 내 잘못이라고. 그렇지만 나를 따라온 것을 후회한다는 그 말은 내게 상처를 된다고. 내가 엄마랑 다니며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침대에 들어 누워버린 엄마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은 저녁, 부르고스 대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브라이언이 내게 물었다.


"엄마랑은 어때?"

"아까 서로 울면서 얘기했어. 그냥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거 같아. 엄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식당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힘들었다. 나는 엄마의 침묵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이 드는 탓에 바람을 쐬야 했다. 거리를 배회하다가 브라이언과 에밀을 만났다. 이따가 축구 경기를 보려고 에밀이 사람을 모으고 있는데 내게 같이 가자고 브라이언이 말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브라이언은 계속 보챘다. 아, 사실 엄마랑 문제가 좀 있어. 그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나를 데리고 브라이언은 곧장 자리를 옮겼다.


그때 엄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추 알게 된 브라이언은 그 후에 별다른 일이 없는지 궁금해했다. 대화의 내용을 세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에 브라이언은 그저 잘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나를 격려해 줬다. 속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내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를 말이다. 어…, 글쎄? 지금 내 기분이 어떻지?


퇴직을 하며 또 다른 직업을 얻게 되었다. 바로, 미술심리상담사이다. 그림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을 하며 내가 가장 많이 한 질문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나를 검은색으로 그리셨는데 당신에게 그 색은 어떤 감정을 들게 하나요? 기분이 나쁘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나쁜 걸까요? 기분이 나쁘다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불편하다, 화난다, 속상하다, 섭섭하다, 슬프다… 이처럼 감정은 정말 다양하죠. 지금 내 마음은 어떤 감정에 가까운지 알아차려 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그에 맞도록 스스로 돌봐줄 수 있거든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느 감정에 가까운가요?


상담을 하며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었는데 잊고 있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스스로 돌보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거라고 그렇게 강조를 해놓고서. 지금은 엄마를 챙기는 게 우선이라며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내게 예비 라이프 코치인 브라이언이 물은 것이었다. 지금 나의 기분은 어떤지.


부르고스 대성당을 비추는 빛


그러나, 여전히 내 기분은 안중에 없었다. 미사를 드리는 내내 여전히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내게 서운함을 느끼는 순간을 잘 알고 있으면서 같은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집을 떠나려는 나를 보며 자신이 그렇게 싫냐며 절규하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 삶에 엄마보다 중요한 것을 들일 때마다 상실감에 휩싸이던 엄마를.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친구의 편을 드는 것처럼 들리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럼 엄마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마음에 휩싸이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또 엄마가 과거를 끌고 오며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은 끝도 없이 자라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밤에 아헤스에서 묵을 걸. 그랬으면 4km를 조금 덜 걷는 거니까 엄마도 좀 몸이 편했을 거고. 사실 그래, 지금 너무 지쳐있는 바람에 더 쉽게 짜증이 난 거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했어야 했고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 나는 왜 그랬지…, 하며 나는 계속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급기야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애초에 엄마랑 까미노를 같이 올 생각을 했을 때 신중했어야 했는데, 이 여행은 처음부터 잘못된 게 아닐까? 어…? 나 방금 엄마랑 되게 비슷하지 않았나?


엄마와 마찬가지로 여태 이곳까지 걸어온 모든 여정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비로소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현재라는 시간으로 돌아온 나는 그제야 성당 안을 메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성당 안으로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괴 대조되는 밝기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오던 빛은 내게도 닿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긋난 것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둬 보자. 그저 모든 걸 맡긴다는 심정으로.


"아멘."


생명의 빵을 건네받고서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 브라이언, 나는 지금 일기를 쓰는 중이야. 이따가 달을 뜨는 시간에 맞춰서 잠깐 나갔다 올 거고. 오늘 보름달이 뜨거든. 그래서 펍은 못 갈 거 같아. 나 나름대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축구에 흥미가 없다고 해도 기분 전환을 하러 가자던 브라이언의 제안을 끝내 거절했다. 엄마가 괜찮은지 알베르게에 가봐야겠다며 말이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나오라며 신신당부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사람들과 어울려 복작거리는 것도 좋지만 나는 되도록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보낸 메시지처럼 나는 나름대로 내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열 시까지 돌아와야 해요."


알베르게가 문을 닫는 시간인 열 시가 다 될 무렵에 내가 밖을 나서는 걸 본 오스삐딸레로는 단호하게 말을 건넸다.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며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하필이면 보름달이 뜨는 시간이 열 시에 가까운 터라 나 역시 마음이 조급했다.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찰나라도 제발.


방향을 보자. 보름달은 동쪽 하늘에 뜨니까, 어쩌면 여기 부르고스 대성당 뒤편에서 보름달이 뜰 수도 있겠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달을 보러 다니는 나는 어렵지 않게 달이 뜨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다행히 땅이 높아서 달이 뜨는 시간을 아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부르고스 대성당 뒤편에서 떠오른 보름달


내 예상은 적중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뒤편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보름달 사냥꾼의 솜씨는 까미노 위에서도 발휘될 만큼 어디 가지 않고 그대로였다.


나는 완벽한 원을 그리며 뜨는 보름달을 동경한다. 나란 존재는 결코 지닐 수 없는 완벽함 앞에 무기력해질 때도 있지만 오히려 이것을 통해 나는 겸허해지는 법을 배운다. 보름달의 이 모습도 삼십 일이 채 되지 않는 주기로 찾아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달 역시 불완전한 모습으로 대부분의 생을 보내는 것이다.


부르고스에 떠오른 보름달

완벽한 원의 모습을 지닌 보름달에만 열광한다면 그간 달이 보내온 성실한 시간을 놓쳐버릴 수 있다. 보름달이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빛날 수 있는 것은 지난 세월 동안 채워지지 못한 모습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보름달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된 시간을 모두 통과하며 빚어진 것이다.


부르고스에 떠오른 보름달은 나를 비춰주며 말을 건넸다. 밤이 지나 점차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도 지켜봐 달라고.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고 채우고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면 좋겠다고. 내게 깃든 이 슬픔 역시 잠시일 뿐이라고 말이다.


다정한 보름달의 이야기에 나는 이 슬픔을 충분히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슬픔이니까. 내게 온 슬픔을 성실히 살펴봐준다면 같은 이유로 더는 눈물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베르게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보름달을 눈에 담았다.



Day 12. JUN 21, 2024

San Juan de Ortega → Burgos, 2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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